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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1,284건
   
서태후와 중국영웅들의 사주
깡통박사 2017-09-30 (토) 08:29 조회 : 3123

서태후, 좀 더 정식명칭으로는 자희(慈禧)황후, 그리고 ‘孝欽慈禧端佑康昭豫莊誠壽恭欽獻崇熙配天興聖顯皇后’라는 어마어마한 공식명칭을 지닌 이 여성은 1835년 11월 29일에 태어났다.
  
  영화에서 보았겠지만, 청나라 신하들은 황제 앞에서 축원을 할 때 ‘만세, 만세, 만만세’라고 한다. 중국 발음으로는 ‘완쑤이, 완쑤이, 완완쑤이’가 된다. 오로지 황제에게 드리는 축원인데, 이 여성은 황제가 아니면서도 그런 축원을 받았으니 사실상의 황제였다.
  
  이 여성은 만주족의‘에흐나라’ 종족 출신이라고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한족 출신인데 가난 때문에 팔려가 만주족의 집안에 입양되었다는 제법 신빙성 있는 설도 제기되었다. 그러니 생일이나 생시가 정확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앞선다.
  
  그래서 그녀의 일생과 행적을 놓고 면밀히 검토해 보았더니 알려진 사주가 대단히 정확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믿어도 좋다는 말씀이다.
  
  일설에 의하면 미모가 뛰어난 그녀는 16세 때, 황제가 있는 황궁인 자금성에 궁녀로 들어갔는데 그 이전에 만주군 기병부대의 대장인 영록(榮祿)이란 남자와 잠시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낭만적인 스토리이므로 홍콩영화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나온다.
  
  당시의 황제는 함풍제였다. 그는 아편전쟁으로 고생한 도광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는데, 바로 그 해 무려 15년간이나 이어진 태평천국의 난-최근에는 혁명이라 불리는-이 발발했다. 그 무렵 조선은 철종을 옹립한 안동 김씨들이 세도정치를 농하고 있었다.
  
  그럼 이 쯤에서 서태후의 사주를 보기로 하자.
  
   연 을미(乙未)
  월 정해(丁亥)
  일 을해(乙亥)
  시 병자(丙子)
  
  을목이 겨울에 났으니 당연히 불이 필요하고 또 토가 필요하다. 월과 시에 정화(丁火)와 병화(丙火)가 있으니 좋으며, 년지(年支)에 미토(未土)가 있으니 좋다. 훗날 운에서 따뜻한 기운을 만나면 크게 발전할 운명이다.
  
  불이 있으니 총명하고 아름다우며, 수기가 원래 강하니 이런 운명은 성(性)적으로도 대단히 탁월한 소질을 지녔다. 물과 불의 조화(造化)가 있기 때문이다.
  
  함풍제는 수많은 여인을 거느렸지만, 자녀를 본 것은 이 서태후 밖에 없었다. 그녀는 희박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제의 눈에 들어 후사까지 이었으니 권력의 원천은 여기서 나온다.
  
  그녀는 1852년 임자(壬子)년에 궁에 들어가 난(蘭)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함풍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난귀인(蘭貴人), 그러다가 1855년 을묘(乙卯)년에는 의빈(懿嬪)이란 이름을 받고 드디어 1856 병진(丙辰)년 4월에 가서 훗날의 동치제를 낳게 된다.
  
  그녀가 황제의 눈에 띈 것이 임자년인데 이는 인수(印綬)의 운세이고, 집중적인 총애를 입기 시작한 것이 을묘년이다. 그녀의 일간(日干)이 을목(乙木)이니 알려진 사주가 정확하다는 것이다.
  
  아들을 낳은 공로로 그녀는 1857년 정묘(丁卯)년에 의귀비(懿貴妃)로 승격했다. 그러나 그 뒤로 황제는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했다.
  
  함풍제는 1861년 나이 서른에 폐결핵으로 요절하였다. 그러자 동치제는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게 된다. 함풍제는 죽으면서 8명의 신하를 지명하여 어린 황제를 보필토록 했다. 일러서 고명대신(顧命大臣)이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명대신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함풍제의 이복동생인 공친왕과 황실의 친척들은 두 명의 태후와 손잡고 바로 정변(政變)을 일으켜 두 태후의 수렴청정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사실상 공친왕과 두 태후의 공동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리하여 새 황제의 연호(年號)도 동치(同治), 즉 함께 다스린다는 뜻으로 정해졌다. 그리하여 새 황제는 동치제가 되었다.
  
  여기서 공친왕의 사주를 잠깐 보기로 하자.
  
  연 임진(壬辰)
  월 계축(癸丑)
  일 계사(癸巳)
  시 계축(癸丑)

  
  사주 원국(元局)은 지나치게 차갑지만, 어려서부터 만나는 대운이 갑인(甲寅), 을묘(乙卯), 병진(丙辰), 정사(丁巳), 무오(戊午) 등 목(木)과 화(火)의 양지(陽地)로 향하니 크게 발전할 상이다. 공친왕은 함풍제의 이복동생으로서 재주가 뛰어나 함풍제로부터 상당한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공친왕은 제2차 아편전쟁 이후 그 수습의 중임을 맡아 1860년 경신(庚申)년에 영국과 프랑스 등과 북경조약을 체결했다. 북경조약의 핵심은 청나라가 북경의 현관인 천진(天津)까지 해외에 개항했다는 점이며 이로서 중국의 개방은 대세로 굳어지고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되었다는 점이다.
  
  재미난 점은 공친왕의 일간(日干)이 물이니 해외 세력의 협상 파트너를 했다는 점, 그리고 서태후가 을목(乙木)인데 계수는 을목을 생하므로 서태후가 권력을 잡는 데 있어 서로 이용 내지는 뜻이 맞았다는 점이다. 그 둘 간의 인연이 좋았던 셈이다.
  
  두 명의 태후 중 동태후는 인품이 곱고 여성다웠던 인물로서 권력에 대한 추구가 없었기에 서태후와 공친왕의 절충에 의해 청 조정은 굴러가기 시작했다.
  
  마침 1864년 갑자(甲子)년에 무려 십 수 년을 끌어온 태평천국의 반란이 끝나자 이를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증국번과 이홍장, 좌종당 등의 유능한 인물들은 공친왕과 함께 서양의 힘을 십분 인식했기에 이른바 양무(洋務)운동을 이끌어 갔다.
  
  여기서 잠깐 태평천국의 난으로 돌아가보자.
  
  사건이 시작된 것은 1851년 신해(辛亥)년이다. 신해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1911년의 신해혁명이다.
  
  봉건 중국은 바로 태평천국의 난과 신해혁명이라는 두 번의 혁명 거사를 통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정확하게 60년 간격이니 60년은 한 갑자(甲子)이고 언제나 역사는 한 갑자라는 기본 순환 주기를 통해 움직여간다.
  
  홍수전에 의해 중국 남부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은 기독교가 지닌 평등사상에 착안하여 예수님을 홍수전은 형이라 하고, 하느님을 중국식으로 상제(上帝)라 하여 일어난 일종의 무산계급 혁명이다. 이것을 민란이라 하느냐 혁명이라 하느냐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
  
  난(亂)이라 하는 것은 어지러운 무엇이기에 그에 앞서 무언가 어지러움을 가져온 원인(遠因)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란은 기층의 불만에 의해 일어나기에 절로 어떤 혁명성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 민란이 지배층에 의해 진압되었다면 민란이고 그것에 의해 지배층이 전복되었다면 혁명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가치(價値)의 문제를 제외하고 하는 얘기이다.
  
  동시에 혁명은 언제나 그만으로서 혁명의 당초 목적을 달성하는 법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모든 혁명은 언제나 미완(未完)이라는 평가를 받기 마련인 것이다.
  
  태평천국의 난 역시 처음에는 토지세 면제와 세금을 적게 하고 빈부의 격차를 줄인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기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내었지만, 조직을 갖추게 되자 그 역시 지주층과의 타협이 불가피해졌고 그 바람에 혁명은 이미 실패의 기미를 나타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태평천국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 기운은 이어져서 60년 뒤 또 다시 신해년에 가서 이른바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 조정은 종말을 고하게 되니 1911년의 혁명은 제2차 혁명인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세상은 언제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일시에 주는 법이 없다는 점이니 보다 유장(悠長)한 시각을 길러야 하는 필요성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잠시 태평천국 진압에 일등 공신인 증국번과 그 막료로서 성장한 이홍장의 사주를 보기로 하자. 특히 이홍장은 구한말 우리 역사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증국번
  
  연 신미(辛未)
  월 기해(己亥)
  일 병진(丙辰)
  시 기해(己亥)
  
  이홍장
  
  연 계미(癸未)
  월 갑인(甲寅)
  일 을해(乙亥)
  시 기묘(己卯)
  
  이 두 사람은 공친왕의 지지를 업고 양무운동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특히 중국번은 원 이름이 자성(子城)이었으나 나라를 지키는 방패가 되겠다는 뜻의 ‘국번(國藩)’으로 개명할 정도로 충성심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의용군인 상군(湘軍)-호남성을 湘이라 한다-을 조직하는 한편 동문의 후배, 즉 문제(門弟)인 이홍장으로 하여금 회군(淮軍)을 조직토록 하여 고전 끝에 마침내 1864년 갑자(甲子)년에 가서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은 공친왕의 신임을 얻었고 서양의 힘, 이른바 견함리포(堅艦利砲), 풀어서 견고한 군함과 날카로운 대포의 위력을 인정하고 그들의 힘과 기술을 도입하는 데 앞장서니 이것이 바로 양무운동이다.
  
  후에 이홍장은 1870년 경오(庚午)년에 수도 북경 일대를 지키는 직예총독 및 서양 열강들과 교섭하는 북양통상사무대신(北洋通商事務大臣)으로 발탁되었는데, 마침 본격화된 일본의 조선 진출에 따른 갈등을 다루는 직접 당사자가 되었으니 우리 또한 눈여겨 보아야 할 사람인 것이다.
  
  두 사람의 사주를 잠시 보면, 증국번은 기개(氣槪)가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고, 이홍장은 명리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곡직인수(曲直仁壽)의 큰 인물임을 말해준다.
  
  서태후의 섭정 아래, 공친왕은 증국번, 이홍장 등을 등용하여 서양 문물을 도입하고 유학생을 파견하며, 신식 군함과 병기를 제조하는 등 새 기운이 돌면서 다시 기세를 살리게 되니 이를 일러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 한다. 여기서 동치란 동치제의 연호를 따옴이다.
  
  하지만 그 새 기운은 청나라로서 약동하는 봄의 기운이 아니라 늦가을의 그저 화려한 단풍놀이요, 쇠약한 병자가 일순 병세가 호전되는 회광반조(回光返照)에 불과했음을 훗날의 역사는 준엄하게 지적하고 있음이다.
 
태평천국의 난리가 끝난 후, 서태후의 섭정 체제 아래, 공친왕을 필두로 한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의 이른바 양무(洋務)파들은 열심히 서양 과학기술의 도입에 진력했고,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청은 잠시 부활의 기미를 보였으니 이를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 부른다 했다.
  
  양무운동은 처음에 태평천국의 난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근대화 흐름으로서 대략 1861년 정도를 기점으로 한다. 이는 중체서용(中體西用), 즉 중국의 전통과 문화를 근본으로 하되 기술은 서양의 것을 가져다 근대화하자는 사상의 실천 운동이었다.
  
  마침 이 때,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에 의한 새로운 개혁의 흐름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흥선 대원군이 한창 왕권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개화의 흐름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바로 이 언저리가 한ㆍ일ㆍ중 동북아시아 3국의 운명이 크게 엇갈리기 시작한 지점이다.
  
  메이지 유신이란 그 본질에 있어 죠오슈(長州)나 사쓰마(薩摩)와 같이 도자기 산업으로 외화를 축적한 지방세력, 이른바 다이묘(大名) 밑에 봉직하던 진취적인 하급 무사들이 주동이 되어 수 백 년 된 막부 통치를 엎어뜨린 급진 쿠데타라 할 수 있다.
  
  막부의 쇼군이 사실상의 통치자였기에 그들은 쿠데타의 명분으로서 잊혀져있던 천황(天皇)-사실상의 제사장을 받들고 아울러서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존왕양이’의 발상으로 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 죠오슈나 사쓰마 번의 신흥세력들은 천황을 세운 후, 어느 순간 서양의 힘과 기술을 모방하고 받아들이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말이다. 이미 막부의 통치가 무너진 터이고, 천황은 사실 허울에 불과했기에 그들의 서양 선회를 막는 반대세력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개의 경우, 쿠데타를 성공시킨 세력은 권력을 잡게 되면 으레 부를 누리면서 다시 타락하거나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기 쉬운 법인데, 이번에 쿠데타를 성공시킨 하급 무사들은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그들은 안위와 부귀를 스스로 포기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는 그 밑바탕에 강렬한 신념과 정열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바로 여기서 일본은 중국과 한국을 크게 앞서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중국 청 조정의 양무파들 역시 나름으로 열심히 근대화를 추진했으며. 특히 이홍장이 만든 북양수사(北洋水師)-수사는 해군을 말한다, 최근 인기 좋은 ‘불멸 이순신’드라마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를 이끌고 있다-는 그 대표적인 성과였다.
  
  북양수사는 영국으로부터 최신예 전함을 도입하고, 훈련과 체계도 서양인 교관이 맡았기에 대단히 근대적인 해군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동치중흥’의 빛나는 상징이었다.
  
  동치제가 어린 나이로 1874년에 사망하자, 을목(乙木) 서태후와 계수(癸水) 공친왕의 상생 체제는 다시 서태후의 누이와 황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황제위에 앉히니 그가 바로 광서제였다.
  
  동태후는 물론 착한 성격이라 허울이었을 뿐이니, 서태후의 권력은 순항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간의 성과가 얼마나 허구였는가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바로 청일(淸日) 전쟁이다.
  
  청일 전쟁은 1894년에서 다음 해에 걸치고 있으니 갑오(甲午), 을미(乙未)의 운이다. 갑과 을, 두개의 목 기운이 무토(戊土) 중국을 누르는 운이니 결과는 뻔하다.
  
  이 전쟁은 동학 혁명을 진압하느라 허둥대던 조선 조정과 민비 일파가 마침 조선에 머물던 이홍장의 막료 ‘원세개’의 말에 넘어가 청의 군대를 불러들인 것이 시발점이었다. 이전에 갑신정변 실패 이후, 또 다시 조선 진출의 기회를 노리던 일본에게 있어 이 일은 좋은 핑계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에 있는 일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출병을 강행했던 것이고, 내심 여차하면 청군과 일전을 겨루어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되찾자는 심산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원세개(袁世凱)라는 인물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이니 우리와도 연관이 있다 하겠으며, 나중에 청이 쓰러진 후 세워진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었고 다시 황제가 되고자 애를 쓰다가 실패하고 죽은 대단한 풍운아이자 권모술수의 달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주를 한 번 살펴보자.
  
  연 기미(己未)
  월 계유(癸酉)
  일 정사(丁巳)
  시 정미(丁未)
  
  1859년 생으로 부친이 이홍장과 막역했던 관계로 그 막료로 일하면서 입신출세했다. 사주를 봐도 대단한 야심가임을 알 수 있다. 머리 회전이 뛰어나고, 배포도 크며 재운(財運)이 강하니 욕심이 땅보다 두껍다는 것을 말해준다.
  
  청일 전쟁의 실패로 이홍장이 물러간 후, 그 뒤를 맡아 사실상 청 정부 군대의 지휘권을 손에 넣었다. 1911년 중국 무창-오늘날의 무한-에서 일어난 신해혁명 당시 손문과 협상하여 민국(民國)을 세울 때 대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그 때가 신해(辛亥)년이라 그에게는 편재(偏財)운이고 대운(大運) 또한 무진(戊辰)운이라 상관생재(傷官生財)하여 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다시 친위 쿠데타를 통해 민국을 다시 제정(帝政)으로 바꾸어 황제가 되려 하다가 반대에 직면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으니 그 때가 1916년 6월, 병진(丙辰)년 갑오(甲午)월이었다.
  
  병화(丙火)와 갑목(甲木)이 들어오니 스스로 분을 참지 못하고 열통이 터져 죽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수양 없고 성미 못된 자의 말로였다. 사주 상으로 볼 때, 뇌일혈이었던 것 같다. 참고로 오늘날 서울 명동의 중국 대사관 터를 잡은 사람도 원세개였다는 것을 밝혀둔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재미난 점이 있으니. 근대 중국의 역사에서 큰 인물들은 모조리 태어난 날이 정화(丁火)였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손문이나 모택동, 장개석, 그리고 원세개까지 모두 일간(日干)이 정화(丁火)이다. 중국은 무진(戊辰)의 나라인데, 정화는 무토(戊土)를 생하는 까닭이라 하겠다.
  
  다시 돌아가서 일본이 청일 전쟁 당시 어떤 생각을 지녔었는지는 건건록(蹇蹇錄)이라는 책 속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당시 일본의 외무장관이던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가 지은 책으로서 당시의 상황을 일본의 시각에서 기록하고 있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었기에, 구한말의 아픈 역사를 알고자 하는 분이라면 당연히 읽어야 할 책이다.
  
  아무튼 청일 전쟁에서 청 정부가 자랑하던 이홍장의 신식 군대와 북양 해군의 함대가 전멸하고 말았는데 이는 대단한 후유증을 가져온다. 이는 양무운동이 사실상 실패했다는 것을 뼈아프게 지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북경에 관광 가시면 ‘이화원’이라는 끝내주게 풍광이 아름다운 공원이 있다. 땅을 파내어 호수를 만들어 ‘곤명호’라고 하고 그 흙으로 산을 쌓아 ‘만수산’이라 한다.
  
  중국 운남성-예전에는 곤명이라 했다-의 아름다운 호수를 본 땄기에 곤명호이고, 만수무강하자고 만수산이라 했다. 수많은 회랑과 호수를 잇는 다리, 아름다운 수목들로 인해 중국 조경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자금성이나 만리장성을 보아도 이 이화원을 보지 못했다면 북경 관광을 못한 셈이다.
  
  그런데 이 이화원을 짓는 데 들어간 비용의 출처가 재미있다. 바로 북양해군을 증설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이었던 것이다. 바로 국방비를 서태후가 이화원을 짓는 데 전용했던 것이다.
  
  북양해군은 1885년 무렵이 되자, 영국과 독일로부터 최신예 전함을 구입하여 막강 위용을 과시하였으나, 그 이후 여기 저기 부정부패가 발생하고 서태후가 뜯어가는 등등 비용 운용이 부실해지면서 병사의 훈련이나 포탄의 공급, 부품의 구입 등 전력을 유지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예산이 그런 식으로 낭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청일 전쟁에서 겉으로는 청이 일본보다 해군력에서 훨씬 강해보였지만, 운용 면에서는 맞수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육군 역시 신식 장비 면에서 청이 일본보다 못할 것이 없었으나 숙달도와 훈련, 보급에서 일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비유하건대, 일본은 소형차를 사서 기름 치고 부품도 갈면서 유지를 잘 한 셈이었고, 청은 3000 cc 급 고급차를 사서 유지 정비를 소홀했던 바람에 정작 경주가 벌어지자 청의 대형차는 아무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겉만 근대화였던 청에게 있어 오늘날 '경제성공학(Engineering Economy)'에서 말하는 '소유 및 유지비용(TCO, Total Cost of Ownership)'과 같은 개념이 없었던 셈이라 하겠다.
  
  양무운동이 허상이었다는 것이 드러나, 당황을 금치 못하던 서태후에게는 곧 이어 권력기반에 커다란 변고를 맞이한다.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위기가 오는 야구 경기와도 같이 말이다. 그 뒷얘기는 다음 글에서 잇기로 한다.
앞서 얘기했던 어린 황제 광서제는 17세가 되자, 서태후는 짐짓 시늉으로 섭정 직에서 물러나고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젊은 황제는 자신의 권력 기반도 세우지 못한 채 강유위라는 개혁론자가 제시한 정책을 급진적으로 채택한다. 1888년 무술년의 일이라 해서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 부른다.
  
  먼저 강유위(康有爲), 중국어 발음으로는 캉유웨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에 대해 알아보자.
  
  연 무오(戊午)
  월 경인(庚寅)
  일 임자(壬子)
  시 경자(庚子)
  
  식신(食神)격 사주이니 총명(聰明)하고 편인(偏印)이 받쳐주니 전형적인 학자의 운명이다. 중국 남쪽의 광동성 출신인데, 청이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일본과의 전쟁에서마저 패하자 더 이상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 싶어 급진 개혁의 필요성을 두루 알리기 시작했다.
  
  진사 시험에 붙은 뒤 북경에 머물면서 고시생들을 규합하고, 열심히 글을 써서 어린 황제 광서제의 눈에 들었다. 광서제는 마침 서태후의 섭정에서 벗어났기에 자신의 정치이상을 펴보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강유위는 청말의 재야운동권 인사라 하겠다.
  
  광서제는 강유위가 쓴 “아피득변정기(俄彼得變政記)”, 즉 러시아의 피터 대제가 개혁을 통해 러시아를 부국강병의 국가로 발전시킨 내용을 읽고 마음을 굳혔다. 여기서 변정(變政)이란 정치 개혁을 뜻한다.
  
  권력 기반은 여전히 서태후가 지니고 있었건만, 철없는 어린 황제는 무턱대고 강유위의 개혁안을 실시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과는 불문가지(不問可知), 개혁의 실패는 물론 자신은 궁궐 안의 깊고 후미진 곳에 유폐당한 뒤 다시는 밝은 세상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바람에 서태후는 이제 섭정이 아니라 사실상 황제로서 행세하기 시작했다.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이 실패로 끝나자 신변 위협을 느낀 강유위는 제자 양계초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다. 강유위는 임수(壬水)인데 무술(戊戌)년이니 편관(偏官) 살(殺)운이라 그럴 법도 하다.
  
  그리고 서태후의 청 조정은 가일층 개혁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차에 이미 허울만 남은 청 제국을 뿌리에서부터 뒤흔들어놓은 사건이 발발하게 되니 바로 의화단(義和團)사건이었다.
  
  원래 의화단이란 백련교에 뿌리를 둔 민간단체였다. 홍콩 영화 황비홍 시리즈에도 나오듯이, 백련교 자체가 마니교와 미륵신앙에 연원을 종교적 민간결사로서 조정으로부터 사교(邪敎)로 취급받아 왔기에 의화단 역시 불법 단체였다. 산동지방에 근거를 두고, 권법과 봉술 연마를 통해 신체를 단련하고, 백련교의 교리를 익히고 수행하는 무리였다. 그리고 유맹(流氓)으로 변한 다수의 농민들을 받아들여 갑자기 세를 불려갔다.
  
  처음에는 서양 열강의 침탈에 반발하여 그저 반기독교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산동지방의 신임 순무(巡撫)-지방총독-가 그들의 애국심을 인정하자, 서태후는 은근히 그들을 지원했고, 그 바람에 의화단의 무리는 돌연 부청멸이(扶淸滅夷), 즉 청나라를 지키고 서양 오랑캐를 무찌르자는 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1900년 경자(庚子)년에 의화단의 무리가 중국 거류 외국인들을 학살한 일이 발단이 되어 서구 열강들과 일본이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에 나서면서 이른바 ‘의화단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는 지난 60년 전에 있었던 1840년의 아편전쟁과 음양오행 상 맥을 같이 한다. 한 번은 중국 정부의 대외 항쟁이었고, 이번에는 민간의 대외 항쟁이었다.
  
  중국의 경우 경자(庚子)의 해는 언제나 대외적인 문제로 강한 반발력을 보여주는 해이자 결과는 언제나 실패로 끝나는 해이기도 하다. 1840년의 아편 전쟁, 1900년의 의화단 사건, 1960년의 대약진운동인데 결과는 모두 참담하다.
  
  대약진운동은 다른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같은 맥락이다. 당시 영국의 산업력을 따라잡는다는 무리한 목표로 시작된 생산력 증강운동이니 역시 대외적인 것이 이슈가 되었던 것이고, 그 바람에 수 천 만의 사람이 굶어 죽었다. 오는 2020년 경자년에 중국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대충 짐작이 가지 않는가!
  
  이는 무진(戊辰)의 나라인 중국이 경금(庚金)의 해에 토생금(土生金)하여 힘을 내지만, 지지(地支)가 자수(子水) 물이니 강한 물 앞에서 오히려 거꾸로 당한다는 뜻이다. 명리에서 말하는 재다신약(財多身弱)의 형국과도 같은 것이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민족주의는 영웅을 만들 순 있어도 나라를 부강케 하지는 못한다는 역사의 교훈이다.
  
  다시 돌아와서, 의화단의 항쟁은 실패로 끝났다. 서양의 최신예 무기 앞에서 권법과 봉술이 별무소용임은 당연한 이치. 서구 열강들과 일본군은 이를 기화로 북경성과 황궁에 진입하여 보물을 약탈하고 궁을 불태웠다. 대제국 청의 무력함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필자가 아홉 살 때였던 1963년에 의화단 사건을 다룬 영화가 국내에도 개봉된 적이 있었다. 제목은 “북경의 55일”이었고, 찰톤 헤스톤과 에바 가드너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였다.
  
  찰톤 헤스톤은 미군 장교로 출연했는데, 자금성의 웅장한 위용과 서태후의 위엄어린 모습, 총과 대포 앞으로 부나방처럼 뛰어드는 의화단의 무지막지한 돌격, 열강 연합군의 사정없는 학살 장면들이 이어지는 일대 스펙타클이었다. 음악도 무척이나 웅장했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어린 마음에 중국인들이 서양 민간인을 학살했다면 범인을 잡아서 죄를 주면 될 일이지 그것으로 전쟁을 일으킬 까닭이 무엇일까, 왜 중국인들은 그저 칼이나 몽둥이 정도를 들고 연발총 앞으로 뛰어들며 죽어가는 것일까, 그 엄청난 적개심의 원천은 무엇일까?
  
  왜 서양의 군인들은 저토록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고도 영화는 정의(正義)가 서양 열강 쪽에 있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과연 그 바탕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 등을 도무지 풀어볼 수 없었고 그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버렸다.
  
  필자로 하여금 역사(歷史)에 대한 강렬한 흥미를 촉발시킨 한 편의 영화가 바로 ‘북경의 55일’이었고, 미처 열을 세지 못했던 어린 나이에 이미 세상은 통제할 수 없는 어지럼들이 난무하는 곳임을 알아버렸던 것이다.
  
  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의화단 사건은 청 제국의 실질적인 종말점이었다. 허수아비 황제와 강한 권력의지를 지닌 서태후를 비롯한 황실 수뇌들은 사건 당시 서안(西安)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이미 취할 수 있는 어떤 행동 대안도 없었다. 그저 서구 열강들과 신흥 강국인 미국과 일본의 처분에만 맡길 뿐이었다.
  
  중국은 그러나 끝내 열강의 직접적인 지배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중국이라는 땅덩어리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어느 한 나라가 독식하기에는 열강간의 상호 견제가 너무도 심했기 때문이다. 독식하지 않아도 빨아먹을 단물이 각자에게 나름으로 충분했다고 보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시장을 얻었고, 독일은 동쪽 아시아 대륙에 진출 발판을 만들었으며, 러시아는 만주를 손에 넣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사실상 확고히 장악할 수 있었고, 미국은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 대륙에 서서히 진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모두 만족했던 것이다.
  
  이미 허울만 남은 청 제국이었지만, 서태후를 비롯한 청 정부 수뇌들은 나름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과거 북방 민족들이 중국에 진출했을 당시에도 중국은 너무도 커서 수도를 양자강 남쪽으로 옮겨서 수 백 년 간 권력을 유지한 전례가 있었기에 열강들 사이의 알력을 잘 이용하면 제국을 이어갈 수 있다는 달콤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인민들은 생각이 달랐다. 원래 청이란 만주족의 나라가 아니던가? 자존심 강한 한(漢)민족들은 이 기회에 한민족에 의한 나라를 세울 것이며, 서양의 힘과 기술을 제대로 습득하여 부강한 새 나라를 만들어보자는 강렬한 희망을 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일부가 바로 혁명파였다. 모든 노력이 좌절된 이후, 남은 것은 혁명을 통해 새 나라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이제 본격적인 탄력을 받기 시작한 것이고, 이를 대변해주는 사상이 바로 손문이 제창한 삼민주의(三民主義)였다.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이 바로 3민인데, 여기서 민족이란 한(漢)민족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며, 민권이란 서구 민주주의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민생이란 모든 사상과 제도, 기술은 어디까지나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하는데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젊은 나이로 광서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는 이제 세살 밖에 안 된 부의를 황제로 지명한다, 하지만 그 직후 서태후 역시 숨을 거두고 만다. 또 부의는 불과 몇 년 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제위에서 내려왔다. 청 제국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러면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의 사주를 살펴보고 끝을 맺기로 하자.
  
  연 병오(丙午)
  월 경인(庚寅)
  일 임오(壬午)
  시 임인(壬寅)
  
  연의 병화(丙火) 재(財)가 워낙 드세니 재다신약(財多身弱)에, 경금(庚金) 인수를 극하니 그 큰 재물, 즉 황제의 자리가 모두 부질없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미 다 지나간 영화(榮華)의 씁쓸한 에피소드인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부의는 죽은 후에 화장(火葬) 유골이 1995년 중국 정부의 선처로 북경의 서쪽 교외에 있는 ‘청서릉’에 함께 묻혔다는 점이니, 저승에서나마 조상들을 만나 그 서러운 한을 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출처 : 서태후와 중국영웅들의 사주 (펌글) - cafe.daum.net/dur6f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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