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張勉)
양력 : 1899년 8월 28일 10시
음력 : 1899년 7월 23일 10시
시 일 월 년
丁 戊 壬 己
巳 辰 申 亥
77 67 57 47 37 27 17 7
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장면[張勉]
1899. 8. 28 인천에서 출생 ~ 1966. 6. 4. 간염으로 병사
정치가.
본관은 옥산(玉山). 호는 운석(雲石).
1899. 8. 28 서울 적선동에서 부 장기빈(인천세관에서 일했음)과 모 황루시아 사이에 3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
1919년 기독교청년회(YMCA) 영어학교,
1925년 미국 맨해튼 가톨릭대학 문과(文科)를 졸업했다.
1948년 맨해튼 가톨릭대학과 1949년 영국 포덤대학, 1957년 미국 시턴홀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각각 받았다.
192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천주교 평양교구 설정을 위한 재단사무를 보는 한편,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한국어와 풍습을 가르쳤다.
1927년 평양교구 설정과 함께 평양으로 이주하여 교회 일을 돌보았다.
193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1945년 8·15해방이 될 때까지 교육자로 활동했다.
1946년 정계에 투신하여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겨울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UN) 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이 국제적 승인을 얻는 데 기여했다. 이어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1949년 초대 주미대사로 부임하여 한미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6·25전쟁 때는 UN과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큰 활약을 했고, 곧이어
1951년 제2대 국무총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했다. 이후 원내 자유당 인사들이 이승만을 대신할 제2대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면서부터 반(反)이승만 대열에 가담했으나, 발췌개헌안이 통과되고 추대 움직임이 수포로 돌아감으로써 야인(野人)으로 돌아갔다.
1955년 신익희 등과 민주당을 조직하여 자유당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으며, 같은 해 민주당의 민주국민당계(구파)를 대표하는 신익희·조병옥과 대비되는 흥사단 중심의 비민주국민당계(신파)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민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같은 해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을 당했으나 경상에 그쳤다.
1959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피선되었고,
1960년 조병옥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했지만 낙선했다. 같은 해 4·19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지자 제5대 민의원을 거쳐 내각책임제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정책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첨예한 정쟁과 우유부단한 지도력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로 이어지면서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총리 취임 9개월 만에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 후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금지 당했고, 한때 이주당(二主黨)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나, 석방된 후 종교생활에 전념하다가
1966년 간염으로 죽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경기도 포천의 가톨릭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1951년 로마 교황청 훈장을 받았으며, 번역서로 〈교부들의 신앙〉이 있다.
달님의 이야기 153
장면(張勉) 평전(評傳)
송우, 정치 평론 columnist & ghostwriter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 이승만과 박정희는 알아도 장면(張勉)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불행한 일이다. 내가 앞에서 종종 이야기하였지만, 이승만은 제1공화국의 통치자였고, 박정희는 제3공화국과 유신공화국의 통치자였다.
그렇다면 장면은 누구인가? 제1공화국과 제3공화국 사이에 찬란한 민간 정권의 꽃을 피우려던 제2공화국의 통치자였고, 박정희 일당의 군사 통치에 의하여 탄생 8 개월만에 쓰러진 지도자이다.
개국 외교 공신
장면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일찍이 박사 학위를 받아 제1공화국 개국(開國)과 함께 이승만의 발탁에 의하여 신생(新生) 공화국(共和國)의 외교 일선에서 몸을 받쳐 나라를 위하여 일한 사람이다.
그가 주미(駐美) 대사(大使)로 임명되어 유엔군의 한국전 파견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인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승만이 민간(民間) 독전(督戰) 거두(巨頭)였다면, 장면은 이승만의 뜻을 받들어 미국에 가서 미군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유엔군이 파견되도록 현지에서 독전을 한 실무 외교통이었다.
이승만의 신임(信任)이 두터웠다. 부산 피난 정부 시절에는 이승만에 의하여 국무총리(國務總理)까지 된 사람이다. 국무총리를 역임한 후에는 신익희 선생을 이어 야당(野黨)인 민주당의 지도자였던 조병옥 선생의 러닝 메이트가 되어 4.19 직전의 3.15 부정 선거 북새통에서도 부통령에 당선될 정도로 정치적 역량과 국민적 지명도가 높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을 아는 사람들이 남긴 기록과 후세의 평을 들어보면, 장면은 야심가(野心家)였고, 유약(幼弱)한 사람이었다는 평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가. 거기에는 곡절(曲折)이 있다.
이승만을 헬리콥터에 태워
첫째로 장면이 야심가라는 대목이다. 장면은 이승만 밑에서 벼슬을 하고도, 신익희나 조병옥 같은 야당 인사들과 손을 잡은 데에는 분명히 야심이 있었다. 이승만 밑에서는 더 클 길이 없고, 그렇다고 이승만에게 보은(報恩)만 하기는 너무나 젊은 나이였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더욱 성장할 야심을 품고, 저를 감싸주던 이승만의 품을 떠나 야당으로 갔으니, 그에게 야심가라는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장면이 국무총리를 하고 있을 때에 우리 나라 정치 이면사(裏面史)에는 충격적인 모사(謀事)가 있었다. 이미 미국 정부 문서를 통하여 일부는 공개된 사실이지만, 남한 땅 전체가 적화(赤化) 직전에 놓여 부산 일우(一隅)에 움츠리고 있는 판에 이승만은 자신의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개헌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때는 이미 이승만의 대북 정책은 미국 의사당의 허공(虛空)을 맴도는 공염불(空念佛)에 불과하여, 미국 정계에서도 이승만에 대한 인기가 폭락하였을 때이다.
이 때에 미국 정부에서 이승만 제거(除去) 공작이 있었다. 미국과 같이 자유 세계 경찰 역할을 하는 강대국이 아니면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음모이다.
이미 이와 같은 미국 정부의 음모는 베트남의 키우 정권이 무너지고, 이란의 팔레비 정권이 붕괴하면서 현대 국제 정치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적라나하게 드러난 사실이다.
이승만 제거 음모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승만을 전선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헬리콥터에 태워 납치하여 제거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엄청난 계획에 장면이 연루되었다는 소리가 있었고, 급기야 장면은 부산 앞 바다에 떠 있는 미군의 LST에 피신하는 운명이 되었다.
장면은 이 대목에 대하여 평생 자기 입으로 한 마디도 한 일이 없지만, 그의 측근이었던 국회의원 한근조는 장면이 이 사건에 깊숙이 관여되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승만이 제거되면 차기 대통령은 물론 장면이 지목되었다. 야심가 장면의 모습이다. 그런 그가 어떤 경로로 신익희와 조병옥에 가까워졌고, 후에 조병옥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까지 당선되었는가는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수녀원에 숨어둔 통치자
다음은 유약한 정치인이라는 평이다. 장면에 대한 이러한 평은 주로 장면 정권을 거꾸러뜨린 박정희 일당으로부터 나와서 기정 사실화 된 말이지만, 내가 보아도 장면의 정치 스타일은 유약하기 그지없었다. 자유도 좋지만 방관은 막아야 한다.
데모도 좋지만 데모가 국정을 마비 상태로 몰면 그러한 데모는 통치력으로 가라앉혀야 한다. 그런데 장면은 자유라는 이름 아래 데모 사태를 방관하고 말아 국정은 수라장이 되었다. 유약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통치력이 없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좋다. 5.16 새벽에 장면은 어떻게 하였는가. 반도호텔에서 잠을 자던 장면은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았다. 국방장관을 부르고 육군참모총장을 불러도 시원치 않을 국가 긴급 사태에 장면은 슬그머니 반도호텔을 빠져 나와 천주교 수녀원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저 혼자 기어 들어갔다.
5.16 사냥개들이 장면 내각의 각료들을 찾아 체포하였으나. 정녕 잡아야할 장면만은 4방8방으로 찾아도 찾을 길이 없었다. 수녀원에 잠입(潛入)하여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과 1군단장이 돕는대도
이 때에 미국은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군사 쿠데타를 인정할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정식으로 천명하였다. 그 때에 장면이 어디 갔느냐는 소리가 도처에서 터져 나왔다.
"미국도 도와준다는데 도대체 국무총리인 장면은 어데 가서 꿈쩍도 하지 않고, 군사 쿠데타에 대하여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는가."
이 때에 장면이 미국 정부의 입장과 뜻을 같이 하였다면, 박정희 일당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가 비록 한강을 넘기는 하였다고 하여도 성공 여부는 뚜렷하지 않다.
더욱이 이 때에 최전방 한국 최강의 제1군단을 지휘하고 있던 한신 장군도 5.16 하루가 다 지나도 군사 혁명지지 발언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 시각에 미국 정부와 제1군단 병력은 장면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면은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수녀원 속에서 천주님에게 기도만 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나 한국 정치 지도자들과 군사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고, 오직 '나라 걱정'만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그 당시 장면이 하였다는 나라 걱정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병력을 동원하여 박정희 혁명군을 진압하면 서울에서 유혈 충돌이 벌어진다는 걱정이었다고 한다. 어이가 없는 일이다.
장면이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 한신 장군은 '상부와 상의하지 않은 군 일부 행동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5월 16일 하기식(下旗式)이 끝나고 냈다. 말하자면 5월 16일 일몰(日沒) 직후까지 적어도 한국 최대 병력 지휘관은 장면의 편을 들고 있었다.
그래도 장면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러한 상황에서 어둠이 짙어지자 한신 장군은 혁명군에 의하여 압송(押送)되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5.16도 새벽 밤에 일어났고, 장면 정권의 최후의 보루도 이른 밤중에 이렇게 하여 끝이 났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다. 일국의 통치자였던 장면은 스스로 자기 정권을 도울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미국이 돕는다 하고, 제1군단장이 돕는다고 해도 쓰러지고 말았다. 제 자신이 제 정권을 지킬 의지가 없으니 하늘인들 어떻게 장면정권을 도와줄 수 있단 말인가.
유약한 정치인, 유약한 통치자였다.
장면(張勉)
양력 : 1899년 8월 28일 10시
음력 : 1899년 7월 23일 10시
시 일 월 년
丁 戊 壬 己
巳 辰 申 亥
77 67 57 47 37 27 17 7
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장면[張勉]
1899. 8. 28 인천에서 출생 ~ 1966. 6. 4. 간염으로 병사
정치가.
본관은 옥산(玉山). 호는 운석(雲石).
1899. 8. 28 서울 적선동에서 부 장기빈(인천세관에서 일했음)과 모 황루시아 사이에 3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
1919년 기독교청년회(YMCA) 영어학교,
1925년 미국 맨해튼 가톨릭대학 문과(文科)를 졸업했다.
1948년 맨해튼 가톨릭대학과 1949년 영국 포덤대학, 1957년 미국 시턴홀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각각 받았다.
192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천주교 평양교구 설정을 위한 재단사무를 보는 한편,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한국어와 풍습을 가르쳤다.
1927년 평양교구 설정과 함께 평양으로 이주하여 교회 일을 돌보았다.
193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1945년 8·15해방이 될 때까지 교육자로 활동했다.
1946년 정계에 투신하여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겨울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UN) 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이 국제적 승인을 얻는 데 기여했다. 이어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1949년 초대 주미대사로 부임하여 한미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6·25전쟁 때는 UN과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큰 활약을 했고, 곧이어
1951년 제2대 국무총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했다. 이후 원내 자유당 인사들이 이승만을 대신할 제2대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면서부터 반(反)이승만 대열에 가담했으나, 발췌개헌안이 통과되고 추대 움직임이 수포로 돌아감으로써 야인(野人)으로 돌아갔다.
1955년 신익희 등과 민주당을 조직하여 자유당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으며, 같은 해 민주당의 민주국민당계(구파)를 대표하는 신익희·조병옥과 대비되는 흥사단 중심의 비민주국민당계(신파)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민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같은 해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을 당했으나 경상에 그쳤다.
1959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피선되었고,
1960년 조병옥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했지만 낙선했다. 같은 해 4·19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지자 제5대 민의원을 거쳐 내각책임제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정책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첨예한 정쟁과 우유부단한 지도력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로 이어지면서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총리 취임 9개월 만에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 후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금지 당했고, 한때 이주당(二主黨)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나, 석방된 후 종교생활에 전념하다가
1966년 간염으로 죽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경기도 포천의 가톨릭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1951년 로마 교황청 훈장을 받았으며, 번역서로 〈교부들의 신앙〉이 있다.
달님의 이야기 153
장면(張勉) 평전(評傳)
송우, 정치 평론 columnist & ghostwriter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 이승만과 박정희는 알아도 장면(張勉)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불행한 일이다. 내가 앞에서 종종 이야기하였지만, 이승만은 제1공화국의 통치자였고, 박정희는 제3공화국과 유신공화국의 통치자였다.
그렇다면 장면은 누구인가? 제1공화국과 제3공화국 사이에 찬란한 민간 정권의 꽃을 피우려던 제2공화국의 통치자였고, 박정희 일당의 군사 통치에 의하여 탄생 8 개월만에 쓰러진 지도자이다.
개국 외교 공신
장면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일찍이 박사 학위를 받아 제1공화국 개국(開國)과 함께 이승만의 발탁에 의하여 신생(新生) 공화국(共和國)의 외교 일선에서 몸을 받쳐 나라를 위하여 일한 사람이다.
그가 주미(駐美) 대사(大使)로 임명되어 유엔군의 한국전 파견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인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승만이 민간(民間) 독전(督戰) 거두(巨頭)였다면, 장면은 이승만의 뜻을 받들어 미국에 가서 미군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유엔군이 파견되도록 현지에서 독전을 한 실무 외교통이었다.
이승만의 신임(信任)이 두터웠다. 부산 피난 정부 시절에는 이승만에 의하여 국무총리(國務總理)까지 된 사람이다. 국무총리를 역임한 후에는 신익희 선생을 이어 야당(野黨)인 민주당의 지도자였던 조병옥 선생의 러닝 메이트가 되어 4.19 직전의 3.15 부정 선거 북새통에서도 부통령에 당선될 정도로 정치적 역량과 국민적 지명도가 높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을 아는 사람들이 남긴 기록과 후세의 평을 들어보면, 장면은 야심가(野心家)였고, 유약(幼弱)한 사람이었다는 평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가. 거기에는 곡절(曲折)이 있다.
이승만을 헬리콥터에 태워
첫째로 장면이 야심가라는 대목이다. 장면은 이승만 밑에서 벼슬을 하고도, 신익희나 조병옥 같은 야당 인사들과 손을 잡은 데에는 분명히 야심이 있었다. 이승만 밑에서는 더 클 길이 없고, 그렇다고 이승만에게 보은(報恩)만 하기는 너무나 젊은 나이였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더욱 성장할 야심을 품고, 저를 감싸주던 이승만의 품을 떠나 야당으로 갔으니, 그에게 야심가라는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장면이 국무총리를 하고 있을 때에 우리 나라 정치 이면사(裏面史)에는 충격적인 모사(謀事)가 있었다. 이미 미국 정부 문서를 통하여 일부는 공개된 사실이지만, 남한 땅 전체가 적화(赤化) 직전에 놓여 부산 일우(一隅)에 움츠리고 있는 판에 이승만은 자신의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개헌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때는 이미 이승만의 대북 정책은 미국 의사당의 허공(虛空)을 맴도는 공염불(空念佛)에 불과하여, 미국 정계에서도 이승만에 대한 인기가 폭락하였을 때이다.
이 때에 미국 정부에서 이승만 제거(除去) 공작이 있었다. 미국과 같이 자유 세계 경찰 역할을 하는 강대국이 아니면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음모이다.
이미 이와 같은 미국 정부의 음모는 베트남의 키우 정권이 무너지고, 이란의 팔레비 정권이 붕괴하면서 현대 국제 정치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적라나하게 드러난 사실이다.
이승만 제거 음모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승만을 전선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헬리콥터에 태워 납치하여 제거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엄청난 계획에 장면이 연루되었다는 소리가 있었고, 급기야 장면은 부산 앞 바다에 떠 있는 미군의 LST에 피신하는 운명이 되었다.
장면은 이 대목에 대하여 평생 자기 입으로 한 마디도 한 일이 없지만, 그의 측근이었던 국회의원 한근조는 장면이 이 사건에 깊숙이 관여되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승만이 제거되면 차기 대통령은 물론 장면이 지목되었다. 야심가 장면의 모습이다. 그런 그가 어떤 경로로 신익희와 조병옥에 가까워졌고, 후에 조병옥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까지 당선되었는가는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수녀원에 숨어둔 통치자
다음은 유약한 정치인이라는 평이다. 장면에 대한 이러한 평은 주로 장면 정권을 거꾸러뜨린 박정희 일당으로부터 나와서 기정 사실화 된 말이지만, 내가 보아도 장면의 정치 스타일은 유약하기 그지없었다. 자유도 좋지만 방관은 막아야 한다.
데모도 좋지만 데모가 국정을 마비 상태로 몰면 그러한 데모는 통치력으로 가라앉혀야 한다. 그런데 장면은 자유라는 이름 아래 데모 사태를 방관하고 말아 국정은 수라장이 되었다. 유약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통치력이 없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좋다. 5.16 새벽에 장면은 어떻게 하였는가. 반도호텔에서 잠을 자던 장면은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았다. 국방장관을 부르고 육군참모총장을 불러도 시원치 않을 국가 긴급 사태에 장면은 슬그머니 반도호텔을 빠져 나와 천주교 수녀원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저 혼자 기어 들어갔다.
5.16 사냥개들이 장면 내각의 각료들을 찾아 체포하였으나. 정녕 잡아야할 장면만은 4방8방으로 찾아도 찾을 길이 없었다. 수녀원에 잠입(潛入)하여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과 1군단장이 돕는대도
이 때에 미국은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군사 쿠데타를 인정할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정식으로 천명하였다. 그 때에 장면이 어디 갔느냐는 소리가 도처에서 터져 나왔다.
"미국도 도와준다는데 도대체 국무총리인 장면은 어데 가서 꿈쩍도 하지 않고, 군사 쿠데타에 대하여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는가."
이 때에 장면이 미국 정부의 입장과 뜻을 같이 하였다면, 박정희 일당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가 비록 한강을 넘기는 하였다고 하여도 성공 여부는 뚜렷하지 않다.
더욱이 이 때에 최전방 한국 최강의 제1군단을 지휘하고 있던 한신 장군도 5.16 하루가 다 지나도 군사 혁명지지 발언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 시각에 미국 정부와 제1군단 병력은 장면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면은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수녀원 속에서 천주님에게 기도만 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나 한국 정치 지도자들과 군사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고, 오직 '나라 걱정'만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그 당시 장면이 하였다는 나라 걱정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병력을 동원하여 박정희 혁명군을 진압하면 서울에서 유혈 충돌이 벌어진다는 걱정이었다고 한다. 어이가 없는 일이다.
장면이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 한신 장군은 '상부와 상의하지 않은 군 일부 행동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5월 16일 하기식(下旗式)이 끝나고 냈다. 말하자면 5월 16일 일몰(日沒) 직후까지 적어도 한국 최대 병력 지휘관은 장면의 편을 들고 있었다.
그래도 장면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러한 상황에서 어둠이 짙어지자 한신 장군은 혁명군에 의하여 압송(押送)되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5.16도 새벽 밤에 일어났고, 장면 정권의 최후의 보루도 이른 밤중에 이렇게 하여 끝이 났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다. 일국의 통치자였던 장면은 스스로 자기 정권을 도울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미국이 돕는다 하고, 제1군단장이 돕는다고 해도 쓰러지고 말았다. 제 자신이 제 정권을 지킬 의지가 없으니 하늘인들 어떻게 장면정권을 도와줄 수 있단 말인가.
유약한 정치인, 유약한 통치자였다.
장면(張勉)
양력 : 1899년 8월 28일 10시
음력 : 1899년 7월 23일 10시
시 일 월 년
丁 戊 壬 己
巳 辰 申 亥
77 67 57 47 37 27 17 7
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장면[張勉]
1899. 8. 28 인천에서 출생 ~ 1966. 6. 4. 간염으로 병사
정치가.
본관은 옥산(玉山). 호는 운석(雲石).
1899. 8. 28 서울 적선동에서 부 장기빈(인천세관에서 일했음)과 모 황루시아 사이에 3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
1919년 기독교청년회(YMCA) 영어학교,
1925년 미국 맨해튼 가톨릭대학 문과(文科)를 졸업했다.
1948년 맨해튼 가톨릭대학과 1949년 영국 포덤대학, 1957년 미국 시턴홀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각각 받았다.
192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천주교 평양교구 설정을 위한 재단사무를 보는 한편,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한국어와 풍습을 가르쳤다.
1927년 평양교구 설정과 함께 평양으로 이주하여 교회 일을 돌보았다.
193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1945년 8·15해방이 될 때까지 교육자로 활동했다.
1946년 정계에 투신하여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겨울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UN) 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이 국제적 승인을 얻는 데 기여했다. 이어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1949년 초대 주미대사로 부임하여 한미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6·25전쟁 때는 UN과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큰 활약을 했고, 곧이어
1951년 제2대 국무총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했다. 이후 원내 자유당 인사들이 이승만을 대신할 제2대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면서부터 반(反)이승만 대열에 가담했으나, 발췌개헌안이 통과되고 추대 움직임이 수포로 돌아감으로써 야인(野人)으로 돌아갔다.
1955년 신익희 등과 민주당을 조직하여 자유당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으며, 같은 해 민주당의 민주국민당계(구파)를 대표하는 신익희·조병옥과 대비되는 흥사단 중심의 비민주국민당계(신파)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민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같은 해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을 당했으나 경상에 그쳤다.
1959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피선되었고,
1960년 조병옥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했지만 낙선했다. 같은 해 4·19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지자 제5대 민의원을 거쳐 내각책임제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정책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첨예한 정쟁과 우유부단한 지도력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로 이어지면서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총리 취임 9개월 만에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 후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금지 당했고, 한때 이주당(二主黨)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나, 석방된 후 종교생활에 전념하다가
1966년 간염으로 죽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경기도 포천의 가톨릭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1951년 로마 교황청 훈장을 받았으며, 번역서로 〈교부들의 신앙〉이 있다.
달님의 이야기 153
장면(張勉) 평전(評傳)
송우, 정치 평론 columnist & ghostwriter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 이승만과 박정희는 알아도 장면(張勉)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불행한 일이다. 내가 앞에서 종종 이야기하였지만, 이승만은 제1공화국의 통치자였고, 박정희는 제3공화국과 유신공화국의 통치자였다.
그렇다면 장면은 누구인가? 제1공화국과 제3공화국 사이에 찬란한 민간 정권의 꽃을 피우려던 제2공화국의 통치자였고, 박정희 일당의 군사 통치에 의하여 탄생 8 개월만에 쓰러진 지도자이다.
개국 외교 공신
장면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일찍이 박사 학위를 받아 제1공화국 개국(開國)과 함께 이승만의 발탁에 의하여 신생(新生) 공화국(共和國)의 외교 일선에서 몸을 받쳐 나라를 위하여 일한 사람이다.
그가 주미(駐美) 대사(大使)로 임명되어 유엔군의 한국전 파견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인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승만이 민간(民間) 독전(督戰) 거두(巨頭)였다면, 장면은 이승만의 뜻을 받들어 미국에 가서 미군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유엔군이 파견되도록 현지에서 독전을 한 실무 외교통이었다.
이승만의 신임(信任)이 두터웠다. 부산 피난 정부 시절에는 이승만에 의하여 국무총리(國務總理)까지 된 사람이다. 국무총리를 역임한 후에는 신익희 선생을 이어 야당(野黨)인 민주당의 지도자였던 조병옥 선생의 러닝 메이트가 되어 4.19 직전의 3.15 부정 선거 북새통에서도 부통령에 당선될 정도로 정치적 역량과 국민적 지명도가 높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을 아는 사람들이 남긴 기록과 후세의 평을 들어보면, 장면은 야심가(野心家)였고, 유약(幼弱)한 사람이었다는 평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가. 거기에는 곡절(曲折)이 있다.
이승만을 헬리콥터에 태워
첫째로 장면이 야심가라는 대목이다. 장면은 이승만 밑에서 벼슬을 하고도, 신익희나 조병옥 같은 야당 인사들과 손을 잡은 데에는 분명히 야심이 있었다. 이승만 밑에서는 더 클 길이 없고, 그렇다고 이승만에게 보은(報恩)만 하기는 너무나 젊은 나이였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더욱 성장할 야심을 품고, 저를 감싸주던 이승만의 품을 떠나 야당으로 갔으니, 그에게 야심가라는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장면이 국무총리를 하고 있을 때에 우리 나라 정치 이면사(裏面史)에는 충격적인 모사(謀事)가 있었다. 이미 미국 정부 문서를 통하여 일부는 공개된 사실이지만, 남한 땅 전체가 적화(赤化) 직전에 놓여 부산 일우(一隅)에 움츠리고 있는 판에 이승만은 자신의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개헌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때는 이미 이승만의 대북 정책은 미국 의사당의 허공(虛空)을 맴도는 공염불(空念佛)에 불과하여, 미국 정계에서도 이승만에 대한 인기가 폭락하였을 때이다.
이 때에 미국 정부에서 이승만 제거(除去) 공작이 있었다. 미국과 같이 자유 세계 경찰 역할을 하는 강대국이 아니면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음모이다.
이미 이와 같은 미국 정부의 음모는 베트남의 키우 정권이 무너지고, 이란의 팔레비 정권이 붕괴하면서 현대 국제 정치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적라나하게 드러난 사실이다.
이승만 제거 음모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승만을 전선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헬리콥터에 태워 납치하여 제거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엄청난 계획에 장면이 연루되었다는 소리가 있었고, 급기야 장면은 부산 앞 바다에 떠 있는 미군의 LST에 피신하는 운명이 되었다.
장면은 이 대목에 대하여 평생 자기 입으로 한 마디도 한 일이 없지만, 그의 측근이었던 국회의원 한근조는 장면이 이 사건에 깊숙이 관여되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승만이 제거되면 차기 대통령은 물론 장면이 지목되었다. 야심가 장면의 모습이다. 그런 그가 어떤 경로로 신익희와 조병옥에 가까워졌고, 후에 조병옥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까지 당선되었는가는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수녀원에 숨어둔 통치자
다음은 유약한 정치인이라는 평이다. 장면에 대한 이러한 평은 주로 장면 정권을 거꾸러뜨린 박정희 일당으로부터 나와서 기정 사실화 된 말이지만, 내가 보아도 장면의 정치 스타일은 유약하기 그지없었다. 자유도 좋지만 방관은 막아야 한다.
데모도 좋지만 데모가 국정을 마비 상태로 몰면 그러한 데모는 통치력으로 가라앉혀야 한다. 그런데 장면은 자유라는 이름 아래 데모 사태를 방관하고 말아 국정은 수라장이 되었다. 유약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통치력이 없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좋다. 5.16 새벽에 장면은 어떻게 하였는가. 반도호텔에서 잠을 자던 장면은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았다. 국방장관을 부르고 육군참모총장을 불러도 시원치 않을 국가 긴급 사태에 장면은 슬그머니 반도호텔을 빠져 나와 천주교 수녀원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저 혼자 기어 들어갔다.
5.16 사냥개들이 장면 내각의 각료들을 찾아 체포하였으나. 정녕 잡아야할 장면만은 4방8방으로 찾아도 찾을 길이 없었다. 수녀원에 잠입(潛入)하여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과 1군단장이 돕는대도
이 때에 미국은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군사 쿠데타를 인정할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정식으로 천명하였다. 그 때에 장면이 어디 갔느냐는 소리가 도처에서 터져 나왔다.
"미국도 도와준다는데 도대체 국무총리인 장면은 어데 가서 꿈쩍도 하지 않고, 군사 쿠데타에 대하여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는가."
이 때에 장면이 미국 정부의 입장과 뜻을 같이 하였다면, 박정희 일당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가 비록 한강을 넘기는 하였다고 하여도 성공 여부는 뚜렷하지 않다.
더욱이 이 때에 최전방 한국 최강의 제1군단을 지휘하고 있던 한신 장군도 5.16 하루가 다 지나도 군사 혁명지지 발언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 시각에 미국 정부와 제1군단 병력은 장면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면은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수녀원 속에서 천주님에게 기도만 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나 한국 정치 지도자들과 군사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고, 오직 '나라 걱정'만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그 당시 장면이 하였다는 나라 걱정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병력을 동원하여 박정희 혁명군을 진압하면 서울에서 유혈 충돌이 벌어진다는 걱정이었다고 한다. 어이가 없는 일이다.
장면이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 한신 장군은 '상부와 상의하지 않은 군 일부 행동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5월 16일 하기식(下旗式)이 끝나고 냈다. 말하자면 5월 16일 일몰(日沒) 직후까지 적어도 한국 최대 병력 지휘관은 장면의 편을 들고 있었다.
그래도 장면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러한 상황에서 어둠이 짙어지자 한신 장군은 혁명군에 의하여 압송(押送)되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5.16도 새벽 밤에 일어났고, 장면 정권의 최후의 보루도 이른 밤중에 이렇게 하여 끝이 났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다. 일국의 통치자였던 장면은 스스로 자기 정권을 도울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미국이 돕는다 하고, 제1군단장이 돕는다고 해도 쓰러지고 말았다. 제 자신이 제 정권을 지킬 의지가 없으니 하늘인들 어떻게 장면정권을 도와줄 수 있단 말인가.
유약한 정치인, 유약한 통치자였다.
출처 : 사주명리 - cafe.daum.net/sajusaj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