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희(申翼熙)
양력 : 1894년 7월 11일 22시
음력 : 1894년 6월 9일 22시
시 일 월 년
乙 甲 辛 甲
亥 寅 未 午
69 59 49 39 29 19 9
戊 丁 丙 乙 甲 癸 壬
申 丑 子 亥 戌 酉 申
신익희(申翼熙,1894.7.11∼1956.5.5)
호:해공(海公) 자는 여구(汝耉), 이명:왕해공(王海公), 왕방우(王邦牛)
한국의 독립운동가, 국회의장
1894년 7월 11일 경기도 광주(廣州)시 초월면 서하리에서 판서를 지낸 신단(申壇)의 다섯 아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때 탄금대 전투에서 순국한 신립(申砬)장군의 10대손이기도 하다.
10세 -- 「사서오경(四書五經)」에「삼국지(三國志)」,「수허지(水許誌)」 등을 독파하고
12세 -- 보통학교에 입학한다. 부친 사망. 3년 상 치름.
15세 -- 이명재(李明載)의 3녀 이승희(李承熙)와 결혼한다.
1908년(15세) --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영어를 배움)하고
1910년(17세) --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조도전대학)] 정경학부에 유학,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조도전대학)] 정경학부(政經學部)에 입학했다. 재학 중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해 총무·평의회장(評議會長)·회장 등을 지내면서 학생운동을 벌이고, 기관지로 〈학지광 學之光〉을 발간했다.
당시 대학동창으로 최두선(崔斗善), 현상윤(玄相允), 장덕수(張德秀)등과 사귀며 국내에서 한일 청년단체를 만들어 윤현진(尹顯振), 윤홍섭(尹弘燮), 이유필(李裕弼)등 동지를 규합하기도 한다.
1913년(20세) --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해공은 경주에 동명강습소를 열어 개화지식을 보급하며 중동학교(中東)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고
1917년(24세) --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비교헌법, 국제공법, 재정학 등을 강의한다.
1918년(25세) -- 6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되면서부터 해공은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나선다. 이 무렵 최린, 송진우(宋鎭禹), 최남선(崔南善)등과의 비밀 회담을 통해 독립운동의 방법을 토의하며 이듬해 3·1운동 때 해공은 이승훈, 유치호등과 연락임무를 맡아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임무 때문에 33인 민족대표자 서명에도 빠진다. 그는 이때 상해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하고, 국내에 잠입한 장덕수와 선을 대는 한편, 해외에 나가있는 문창범, 홍범도 등과의 연락을 위해 중국으로 떠난다.
1919년(26세) -- 얼마 후 손병희를 데리고 나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면서 전도교당 건축비로 모은 돈을 독립군 군자금으로 쓰기위한 임무를 띠고 국내에 잠입하나 손병희가 이미 체포된 후여서 이해 3월 19일 상해로 망명한다. 김시학(金時學)·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이승훈(李昇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중봉기할 것 등을 협의한 후 국내 동지들의 특파로서 대내외적으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상해방면의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기 위해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외무차장·국무원비서장·법무총장·외무총장·문교부장 등을 지냈다.
그 당시 상해는 지리적으로 동서 교통의 요지가 되어 있고, 또 일제(日帝)의 횡포 압제를 덜 받을 수 있는 곳일 뿐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아온 동제사(同濟社)의 조직 및 신시대, 신정세에 발 맞추어 활동하는 신한청년당원들의 활동이 국내외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조성환(曺成煥)·신석우(申錫雨)·조동우(趙東祐)·신규식(申圭植)·선우혁(鮮于爀)·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상해 불란서조계 보창로(寶昌路)의 허름한 집을 임시사무소로 정하고 모여서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4월 10일에 상해에 모인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議員)으로 하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를 열고 국호, 관제(官制),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을 맞게 된 것이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4월 25일 임시의정원법을 초안 낭독하여 가결, 채택케 하였으며, 임시정부의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다.
1919년(26세) -- 임시의정원 제6차 회의인 9월 6일 오후에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헌법의 통과가 있은 다음, 다시 정부 개조안 토의가 있었다.
정부 개조안의 내용은 한성정부의 기구와 각원을 그대로 통합 정부의 기구와 각원으로 하되 수반인 집정관 총재의 칭호를 대통령으로 고치는 것이었다. 그 중에도 기구에 있어서나 대통령 칭호에 있어서는 이미 통과된 헌법 제3장과 제5장에 의하여 결정을 본 것이니 여기서는 다만 인원의 선임 절차가 남은 것뿐이었다. 그것도 국무원의 선임은 대통령의 직권에 속하는 것인즉 임시의정원에서 할 일은 헌법 제21조 5항에 의하는 임시 대통령의 선거와 제15조 4항에 의하는 국무원 임명에 대한 동의뿐인 것이었다.
따라서 먼저 대통령을 선거하기로 하였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헌법이 아직 발포되지 않았으니 대통령의 선거 방법을 새 헌법 중 임시대통령 선거 규정에 의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것이었다. 만일 새 헌법에 의하여 임시대통령을 선거하기로 한다면 현정부는 이미 소멸된 것이며, 헌법의 발포권도 새로 선거된 대통령에게 있는 것이라고까지 논의가 비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법무차장인 신익희는 현정부는 아직 소멸되지 않았으며 초창기이니만큼 통상적인 준례만 따를 것이 아니라 장차 발포되리라 믿는 그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을 선거함이 부득이한 일이라고 피력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투표케 되었고 이승만(李承晩)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1919년(26세) -- 8월 그는 다시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가,
1920년(27세) -- 9월에는 외무총장이 되었다.
1922년(29세) -- 초에 개최된 태평양회의는 국민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 주었는데 그 까닭은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의 실패로 인하여 임시정부의 동태가 파탄적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민대표회의의 소집 운동이 고조되었으며, 같은 해 2월 8일부터 개막된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었다. 3월 11일에 그를 비롯한 5명의 의원은 국민대표회의는 정부가 주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시국 수습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부결되었고 국무원은 총사퇴하여 정국은 혼란 속에 빠져 들어갔다. 따라서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의정원이나 국무원에서는 대통령에게 전보를 쳐서 속히 상해로 건너와 사태를 수습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대통령은 귀국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여 정국은 더욱 혼미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법정연구회(法政硏究會),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등이 조직되어 사태수습을 도모하였는데 이때 그는 시사책진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후 각처에서는 다시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단체의 난립은 파쟁과 의견충돌만을 야기할 뿐 효과적이고 조직적인 광복운동에는 기여함이 적었다. 이리하여 독립지사들은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승적(大乘的) 견지에서 통일된 단체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임정」기치하에 단결하였다. 그 첫 시도가 유일독립당(唯一獨立黨)의 조직이었다.
1923년(30세) -- 1월 18일 김상옥(金相玉)의사의 의거를 지휘하며 , 장개석 총통등 중국정부 요인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1932년(39세) -- 1월 일본이 상해사변을 도발하여 중국 본토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이 급변하는 객관적 정세에 비추어 독립운동 세력의 총집결을 절감하고 또다시 통합운동을 모색하였다. 이때 그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35년(42세) -- 이들 대표는 처음에는 선전공작에 주력하다가 마침내는 단일당의 창립에 합의하여 7월 5일에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고,
1937년(44세) -- 다시 분열되어 그는 김인철(金仁喆) 등과 함께 조선민족투쟁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7년(44세) -- 조선민족투쟁동맹은 좌익진영인 조선민족 혁명단, 조선혁명자연맹과 합하여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을 결성하였으며 우익진영에서는 7월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陳線)을 결성하였다.
1940년(47세) -- 5월에 광복진선에서는 한국독립당을 재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 광복군을 창건하였으며, 민족전선측은 동시에 따로 조선민족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독립운동 단체는 양대 진영으로 완전히 분립되었으나
1941년(48세) --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양분된 광복운동에 일대전환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절박한 현실은 사상적 대립에 앞서 민족의 총역량을 집결시키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민족 의용대는 광복군의 지대로 편입하게 되었고 민족전선의 간부들은 임시정부의 의정원에 들어와 독립이 될 때까지 항일전을 계속하게 되었다.
1942년(49세) -- 6월에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外交硏究委員會)를 설치하기로 하고, 23일에 외교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여 외교 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 제공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장건상(張建相)·이현수(李顯洙)·이연호(李然浩)와 함께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으며, 이듬해 2월에는 박찬익(朴贊翊)·최동오(崔東旿)·김성숙(金星淑)·유림(柳林)을 연구위원으로 임명하여 그 진용을 보강하니 여기서 중대시국에 임시정부의 외교활동도 비로소 그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때 그는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50세) --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를 보게 되니 여기서 선전 업무는 좀더 강력히 집행할 수 있었다. 즉 이때 새로 설치된 선전부에는 총무·편집·발행의 3과와 함께 선전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체의 선전 사업과 각종 선전 지도를 총할하여 행하게 되었는데, 초대 선전부장에 김규식(金奎植)이 선임되었으며, 그는 조소앙(趙素昻)·엄항섭(嚴恒燮)·유림(柳林) 등과 함께 선전계획 수립, 선전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즉 그는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1945년(52세) -- 12월 1일 임정내무총장의 자격으로 26년 만에 환국, 전북 옥구비행장에 내린다. 귀국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들어 부회장을 맡았음, 귀국 후에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는 노선을 달리했으며, 정치공작대·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정치활동을 했다.
1946년(53세)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 학장 등을 지냈으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47년(54세)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이 되었고, 지청천(池靑天)이 이끈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과 결탁하여 대한국민당을 결성,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의장이 되었으며,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과 합작,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48년(55세) --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가 같은 해 8월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 이래 1950년 1955년 선거에서 고향인 광주에서 출마 3선의 영예를 누리며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 초대국회 의장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으로 각광을 받는다.
1949년(56세) --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한 한국민주당의 김성수의 제의를 받아들여 한국민주당과 합당,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고 당 위원장에 취임했다.
1950년(57세) --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다시 국회의장에 피선되었다. 이어 제3대 민의원에도 당선되었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위원에 당선되고 이어서 국회의장이 되었다.
1953년(60세) -- 영국여왕 엘리자베스2세 대관식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고 친선사절로 우방각국을 순방하며
1955년(62세) --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 발전시켜 그 대표최고위원에 뽑혔다.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 발전시킴과 아울러 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63세) --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 자유당의 이승만(李承晩)과 맞서 5월 15일 호남지방으로 유세를 가던 중,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작고하였다.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 자유당의 이승만과 맞서 호남지방으로 유세하러 가던 도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함.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54년(61세) 5월 국회의장의 임기를 끝내고 공관을 나올 때는 본인의 소유인 집 한 채가 없을 정도였다고 함. 선생 사망 후 미망인 김해화 여사는 무려 25년 간 셋방살이를 해야 했고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잠실 25평형 아파트로 입주할 수 있었다고 함. 외아들 고 신하균 선생은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중국인 여자와 결혼하여 출생한 손자가 현재 중국에 있음.
1956년 3월18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저 유명한 "한강백사장에서 500,000만의 청중(당시 서울시민이 1,500,000만으로시민 1/3 일 참가한 것임)에 국민에 보내는 유명한 연설을 남기였고, 당시 국민의 절대 다수의 지지를 받고 당선이 결정적인 때 호남지역 유세를 위하여 5월 4일 밤열차로 전주로 가든 중 함열역을 지나면서 기침하였으나 하늘도 무심하게 5월 5일 아침에 향년 63세로 서거하니 대다수의 국민이 대성통곡하고 탄식하였으며, 당일 영구가 서울역에 도착하여 효자동 164-2호 자택으로 운구하는 과정에 수십만 군중이 길거리에서 애도 했으며, 경무대(청와대) 앞에 이르자 수만 군중이 선생의 사인 규명을 외치며 경무대로가 이승만 대통령을 면회하여 사인을 규명하자는 군중에 군경의 발표로 2명이 즉사하고, 27명이 부상당하고, 700여명이 체포되어 50여명이 실형을 받는 등 국민들의 해공선생에 대한 기대와 애국애족 정신에 절대적인 지지와 애정이 충만했으며, 5월 23일 국민장으로 수유리 산록에 장례를 모실 때도 길거리는 수십만 군중이 눈물바다를 이루었으며 후학들이 숭고한 정신과 의회정치확립에 크게 공헌한 업적을 받들기 위하여 국회의사당 중앙 홀에 동상건립, 국민대학교 교정에 동상을 건립, 남한산성광장에 동상건립, 서울시 강동구 마을마당에 동상건립,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서하리에 동상건립 및 초월면 서하리에서 남한산성까지의 길을 "해공길"로 명명하는 등 국민들의 많은 분들이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추모하며 지금도 각지에서 5월 5일에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추모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실정이며, <추모기념사에서>
신익희의 손자는 중국 '동력대왕' | 중국문화까발리기 2003/12/12 16:23
출처
http://blog.naver.com/jhmo71/140000441680 * 사진 설명: 작년 청뚜(成都)에서 열린 '2000년 국제서부포럼' 기자회견장에서 질의에 답변하는 왕지엔밍씨.
그동안 간간이 알려졌던 중국의 ‘동력대왕’(動力大王) 왕지엔밍(王建明·55)씨의 내력이 근착한 《중국서부》(中國西部)에 상세히 보도되어 흥미를 끌고 있다. 이미 지난 1999년 7월 베이징에서 발행되는 《중화공상시보》에 왕씨가 ‘한국에서 국회의장을 지낸 해공 신익희 선생의 손자‘라고 보도되면서, 일부 한국 언론에서도 주목을 받았었다. 허나 그의 내력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었다.
현재 왕씨가 회장(董事長)으로 재임하고 있는 광시위차이(廣西玉柴)기계집단은 1994년 12월 뉴욕증시에 상장될 정도로, 고성장과 고수익을 내는 중국의 대표적인 국영기업. 지난 10여년간 중국의 내연기관 부문에서 매출액과 수익에서 줄곧 1위를 독차지하는 위차이가 오늘과 같은 도약의 날개를 달은 것은 85년 왕씨가 공장장을 맡으면서부터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위차이는 동종기업 순위 173위로 일개 성의 작은 국영기업에 불과했다.
전체 노동자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공장장에 선임된 왕씨는 먼저 솔선수범 하는 자세로 나태하고 안일주의에 젖은 공장 내 작업분위기를 일신하였다. 여기에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평생동안 기차조차 보지 못했던 일자무식의 지식수준 향상을 위해서, 다양한 학습반을 개설하고 지식경연대회를 개최하는 등 전력을 기울였다. 이에 85년 2000명 전 직원 중 겨우 56명이었던 대학졸업자는, 지난 해 석사학위 취득자 28명, 대졸자 400명, 고급엔지니어 324명 등 놀라운 인재 배양능력을 과시했다.
또한 93년부터는 다른 중국의 국영기업이 상상도 못했던 근무에 있어서의 각종 인션티브제도를 시행했고 노동자들을 위한 다양한 복리후생시설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에 끝나지 않고 왕씨는 스스로 업무 외 시간에도 변화하는 세계 조류를 주시하여, 국내외 시장환경을 깊이 연구하고 끊임없이 자기발전에 전념했다. 이러한 왕씨의 다각적인 노력에 의해 위차이는 해마다 연간 60%씩 성장하여, 2000년 현재 매출액 23.4억위안(우리돈 3300억원), 이윤 4.8억위안에 이르는 고속성장을 기록했다.
왕지엔밍씨의 부친은 해공의 외아들인 고 신하균씨. 중일전쟁 말기 상하이에서 충칭으로 이전한 임시정부에 근무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신씨는, 중국의 저명한 학자인 궈모루(郭沫若) 아내의 여동생인 위리런(于立人)씨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다. 해방후 환국하는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왔던 위씨는 고향에 대한 향수병을 이기지 못해, 46년 9월 두 아들과 데리고 중국으로 되돌아왔다. 당시 위씨는 귀국 길에서 일본을 경유했는데, 이 때 동경만에서 낳은 막내아들이 바로 왕씨이다.
그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중 양국이 적대관계로 변하면서 신씨와 위씨간에는 소식조차 끊기게 된다. 모친 슬하에서 굳세게 자랐던 왕씨는 지난 68년 상하이교통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자발적으로 하방하여 ‘전국노동자모범’으로 뽑혔고, 개혁개방 후에는 '5·1 노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96년에는 전국 우수기업가로 선정된 경력도 지니고 있다.
지난 1993년에야 두 형과 함께 한국을 처음 방문했던 왕지엔밍씨는 이미 고인이 된 조부와 부친의 묘소에서 눈물을 뿌릴 수밖에 없었다. 신하균씨의 맏아들인 충칭(重慶)씨는 현재 티엔진(天津)대학 화학과 교수로, 둘째인 지엔핑(建平)씨는 티엔진댐 건설설계원 부원장을 맡고 있다. 지엔밍씨를 비롯한 해공의 손자들이 왕씨 성을 가진 것에 대해서 《중국서부》는 “1919년 신익희 선생이 일제의 폭압적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투신할 당시 성을 왕으로 바꾸었다”며 “주변 사람들은 신선생을 왕하이(王海)라고 불렸다”고 전했다.
《중국서부》는 또한 “왕지엔밍은 중국 서부지역을 대표하는 선진적인 기업가로, 위차이의 성공적인 기업개조는 전적으로 왕의 공로”라고 추켜세우며, “왕은 중국과 한국에 뒤얽긴 비극적인 가족사를 딛고 일어서 양국 간의 우호를 더욱 돋독히 할 인물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