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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2,382건
   
희대의 간신, 진회(秦桧) 사주
Mr.대산 2017-10-06 (금) 09:27 조회 : 1697

진회(秦桧)
 

양력 : 1091년  1월 23일
음력 : 1090년 12월 25일
 

시 일 월 년
 

壬 乙 己 庚
午 卯 丑 午
 

64 54 44 34 24 14 4
丙 乙 甲 癸 壬 辛 庚
申 未 午 巳 辰 卯 寅
 

자축공망, 기토당령, 1155년(을해년 67세)에 사망함.
 
 
 
 
 
 
 

악의 상징 진회(秦檜)의 삼자옥(三字獄)
 
 
 
 
 
 
악비묘 앞에는 양손을 뒷굼치에 묶어 놓고 상반신을 발가벗긴 네 개의 철상(鐵像)이 있다.
 

송고종의 하수인으로서 중국인들이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악비를 모해(謀害)하고 민족을 팔아먹은 진회(秦檜)와 그의 아내 왕씨, 만사설(万俟卨)과 장준(張俊)의 철상이다.
 

800년 동안이나 하늘을 찌르듯 서있는 고목이 둘러싼 이 묘역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악비를 숭상하는 마음으로 경배를 한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철책에 갇힌 채 묶여 있는 이들을 분노의 눈빛으로 노려보며 증오한다.
 

"정사자고동빙탄(正邪自古同氷炭) 훼예우금판위진(毁譽于今判僞眞)"이라는 말을 써 놓아 역사의 공정한 판결을 증명하자는 것이다.
 

빙탄(氷炭)이란 얼음과 숯불같이 서로 엄격히 상반되는 것을 말한다. 정(正)과 사(邪)는 그런 것이다. 살아서 영화를 누리고자, 옳은 사람을 모해한 이들 네 사람은 명예를 잃어, 그 철상(鐵像)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뱉는 침을 받고 증오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
 

  누가 그랬다. 같은 땅에서 난 철이라도 어느 것은 악비가 되어 절을 받고 어느 것은 진회의 무리가 되어 침을 받는가? 하도 사람들이 침을 뱉아서 철상 뒤에는 제발 침을 뱉지 말아 달라는 당부의 글귀까지 있다.
 

그렇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누가 알아주고 훗날에 그 진실을 판단해 달라고 옳은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살아가는 동안의 자존심일 뿐이다.
 
 
 
 
 
 
 

진회는 강소성(江蘇省) 강령인(江寧人)이다. 송휘종(宋徽宗) 정화(政和)5년인 1115년에 진사(進士)가 되어 정치무대에 등장한다.
 

정강(靖康)원년인 1126년, 금군(金軍)이 황하를 건너 변경을 포위하였다.
 

이듬해(1127년) 변경이 함락되고 어사중승(御史中丞) 진회는 휘종, 흠종과 함께 포로가 되어 북방으로 끌려갔다.
 

진회는 아첨을 하여 금군의 총사령관을 따라 남정(南征)을 하면서 군무(軍務)를 보기도 하였다.
 

남송이 남경(南京 : 지금의 河南省 商丘)에 수도를 정하자 금의 통치자는 남송의 정국을 자세히 알고자 1130년, 진회를 돌려보내고 내부 공작을 하도록 하였다.
 

약속대로 진회가 정권을 장악하면, 반드시 남송은 굴복하고 투항을 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항금파(抗金派) 장군들을 모해(謀害)할 필요가 있었다.
 

이듬해 재상이 된 진회는 "남인귀남(南人歸南) 북인귀북(北人歸北)"이라는 화의원칙(和議原則)을 제출하였다.
 

남쪽 사람들은 남쪽으로 돌아가고 북쪽 사람들은 북쪽으로 돌아간다라는 이 제안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남송이 근거지인 강남을 버리고 다시 강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므로 적에게 바로 노출되는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소흥(紹興)8년인 1138년이 되자, 진회는 화의조건을 바꾸기로 하고 자기가 미워하는 장군들의 병권(兵權)을 삭감하여, 자신의 지위를 튼튼히 하려 한다.
 

송 고종은 안락왕(安樂王)을 시켜 화의를 주장하게 하고, 여러 차례 왕륜(王倫)을 금국(金國)에 파견하여 휘종(徽宗)의 영구(靈柩)와 모후(母后)인 태후(太后)를 송환하는 문제와 화의(和議)에 관한 사항을 논의하게 하였다.
 

그러나 악비는 일관되게 화의에 반대하면서 송 고종에게 상서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금인(金人)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화의는 절대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재상(宰相)은 나라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고 일신의 안일만 일삼고 있습니다. 후세 사람들의 조롱이 두렵습니다."
 

진회는 이 일로 악비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소흥(紹興)9년인 1139년, 국가적인 굴욕이라는 것을 잊은 채 "소흥화의(紹興和議)"가 이루어지고 고종은 천하에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려 화의(和議)의 성공을 축하하였다.
 

그리고 진회를 표창하여 고종의 태사(太師)로 삼고 항주의 망선교(望仙橋) 아래 물가에 "일덕격천각(一德格天閣)"이라는 태부(太府)를 지어 주었다.
 

과연 악비의 예상대로 화의는 오래 가지 않았다. 금의 올술은 화의를 깨고 대거 남침을 하였다.
 

악비는 언성( 城)과 영창(穎昌 : 지금의 河南省 許昌)을 오고가며 금군과 피나는 항전을 펼쳤고 드디어 주선진(朱仙鎭)에서 대첩(大捷)을 거두어 황하를 건너 황룡부(黃龍府)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진회는 먼저 장준(張俊), 유기(劉琦), 한세충(韓世忠) 등을 소환하고 조용히 고종을 설득하여 이렇게 말했다.
 

"악비의 군대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어찌 홀로 밖에서 주둔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종은 그 날로 12방면에 금패(金牌)를 돌려 악비의 군대를 회군하도록 하였다.
 

악비는 돌아온 즉시 병권(兵權)을 박탈당하고 추밀부사(樞密副使)라는 한직(閒職)에 임명되었다. 이 때 올술은 진회에게 밀서를 보내어 이렇게 말했다.
 

"악비를 죽이지 않으면 화의는 오래 가지 못한다."
 

악비가 금나라에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자 진회는 악비를 해할 음모를 꾸몄다. 그는 감찰어사 만사설(万俟卨)을 부추겨서 악비를 모함하는 상주서를 조정에 올렸다. 결국 악비는 만사설이 날조한 허다한 죄목으로 관직을 내놓고 악주로 은퇴했다.
 
그러자 진회는 악비의 원래 상관이었던 장준(張俊)과 결탁하고, 악비군의 부장인 왕귀, 왕준 등을 사주하여 악비의 수하 장수 장헌(張憲)이 악비를 도와 병권을 탈취하려고 병변을 일으켰다고 참소했다. 그리고 악비의 아들 악운도 장헌에게 편지를 써서 이 일을 획책한 바 있다고 참소했다.
 
 이리하여 소흥11년(1141) 9월, 장헌이 먼저 옥에 갇히고 10월에 악비와 악운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진회는 어사중승 하주(何鑄)를 보내어 악비를 심문했는데, 악비는 두말하지 않고 옷을 벗어 등에 새긴 ‘정충보국(精忠報國)’ 문신을 보여주었다.
 

이를 보고 크게 감동한 하주는 더 이상 심문하지 않고 그를 옥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악비의 죄목이 적힌 서류들을 읽어보았는데 반역을 했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주가 그 사실을 보고하자 진회는 그를 다른 곳으로 따돌려 버리고, 다시 만사설에게 명해 악비의 죄목을 만들게 했다.
 
조정대신들은 악비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어떤 관원들은 상주서를 올려 악비를 변호하였지만, 도리어 진회 일당에게 해를 입었다.
 

이에 분노한 노장 한세충은 진회를 찾아가 악비가 반역을 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추궁했다. 그러자 진회는 “비록 증거는 없지만 혹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소흥11년(1141년) 12월, 진회는 아내 왕씨가 사는 동창(東窓)에서 계책을 정하고 "막수유"라는 세 글자의 죄명을 씌워 장수로서 뱃속에 뜨거운 피가 끓고 온 몸을 다해 수많은 전투를 치룬 민족의 영웅을 대리사(大理寺)의 풍파정(風波亭)에서 죽였다.
 

그리고 악운과 장선을 죽이고 가족들은 모두 영남( 南)으로 유배를 보냈다.
 

악비의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용서해 주자는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심한 핍박을 받았고 악비를 모함하는 일에 공로가 있는 사람은 관작(官爵)이 더해지고 진회 자신은 태사위국공(太師魏國公)이 되었다.
 

진회는 정권을 잡고 마음대로 국정을 농단하고도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고 매사를 극단적으로 처리하였다. "서호유람지여(西湖游覽志餘)"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진회의 외손녀인 숭국부인(崇國夫人)이 6-7세 쯤에 고양이를 사랑했는데, 그것을 잃어버리자 임안부(臨安府)에 명을 내려 찾도록 하였다. 수백 명을 잡아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찾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
 
고양이 그림을 수백 장 만들어 각 주막과 나루터에 붙였으나 결국은 찾지 못하였다. 부윤(府尹) 증빙(曾 )이 사람을 시켜 금빛 고양이를 바치자, 그 일이 중지되었다."
 

이 고사는 진회가 얼마나 권력을 휘둘렀는지, 그리고 당시의 관리들이 얼마나 그를 두려워했는지를 일게 해 주는 일화이다.
 

진회는 정권을 20년 가까이 잡고 있으면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국고(國庫)를 고갈(枯渴)시켰다. 진회가 나라를 팔아먹고 충신과 유능한 인물들을 죽인 것이 얼마나 원망스러운 일인지는, 진회가 전권을 휘두를 때 오로지 죽음의 화를 입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는 민간(民間)에, 진회가 귀신이 쓰여서 죽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였다.
 

"전당유사(錢唐遺事)"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진회가 악비를 죽이려고 할 때 동창에서 아내 왕씨와 모의를 하였다. 왕씨가 호랑이는 잡아야 편안하지 놓아주면 곤란하다 라고 말했다. 진회가 그 말을 듣고 결심을 굳혔다.
 

나중에 진회가 서호에서 배를 타고 노는데 배 안에서 갑자기 병을 얻었다.
 

어떤 사람이 나타나 '네가 나라를 그릇되게 하고 백성을 해쳐서 내가 하늘에 호소하여 병을 주게 하였다' 라고 하였다.
 

진회는 집으로 돌아가서 병으로 죽었다. 얼마 후 그의 아들 희(熺)도 죽었다.
 

왕씨가 병이 들어 방사(方士)를 불렀더니 아들 희(熺)가 쇠로 된 형틀을 쓰고 나타났다. '태사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자 '풍도( 都)에 있다'라고 대답했다. 방사가 그 말을 듣고 가서 보니 진회가 만사설(万俟卨)과 함께 쇠로 만든 형틀을 쓰고 고통을 받고 있었다. 진회가 이렇게 말했다. '가서 빨리 나의 아내에게 말하시오. 동창에서의 일(악비를 모함해서 죽인 일) 때문이라고.'"
 

이 이야기는 비록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악비를 추모하고 진회를 미워했는지 말해 주는 것이다.
 
 
 
 
 
 
 
 
 
* 이림보와 진회 * 
 
 

당나라의 재상 이림보는 사람됨이 간교하고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다.
 

배오경과 장구령의 재능이 자기에 못지않고 이적지가 자기와 권력을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안 이림보는 음모를 꾸며 그들을 조정에서 내쫓았다. 하지만 자기의 심복과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는 두터운 교분을 지켰다.
 

우선객. 진희열 등은 이림보와 무려6~7년을 함께 같이 지냈다. 이들이 이림보와 이와 같이 이토록 긴 시간을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사람됨이 이림보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충신을 모해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질투했던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모두 이림보의 심복의 부하였으며, 이림보에게 무조건 순종하여 그의 환심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송 고종 때의 진회는 이림보와 다른 타입이다. 그는 초기에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2~3년 내에 말단 관직으로부터 최고의 계층인 대신으로까지 진급시켜주곤 하였다.
 

예를 들면 사재는 어시검법관에서 우정원으로 진급하였고, 다시 간의대부로 올랐다가 나중에는 검서추밀원까지 발탁되었다. 또 시거는 중서검정관에서 이부시랑으로 발탁시켰고, 정중웅도 정언에서 일시에 이부사랑으로 발탁시켰다.
 

더구나 임명장을 받은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시거는 다시 부정승인 삼지정사로 껑충 뛰어올랐고, 정중웅은 첨주로 날아 올랐다. 심지어 진회는 전중시어사로 있던 송박을 승급시키려고 어사대에게 명하여 본기관에 검법주부의 자리가 비었으니 누구누구가 마땅하다고 상소문을 올리도록 종용까지 하였다.
 

진회는 그 상소문을 이유로 송박을 시어사로 발탁할 것을 황제에게 상주하였다. 송박은 뒤이어 어사중승으로 되었다가 나중에는 첨주까지 올랐다. 구름을 탄 듯 하루아침에 조정의 최고위급 관리가 된 이 사람들은 희노애락이 무상한 진회에 의하여 몇 달 못가서 파면 당하는 운명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눈치를 살피고 진회의 비위를 잘 맞출 줄 아는 양원만은 예외였다.
 

양원은 진회의 일거수 일투족, 심지어는 그의 식성마저 파악하며 진회를 떠받들었다. 한번은 진회가 밥을 먹다가 그만 재채기를 했다. 입안의 밥이 튕겨나가자 진회가 껄껄 웃었다. 이때 함께 있던  양원도 그를 본 따 재채기를 하면서 박장대소하였다.
 

옆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는 퍽이나 안 되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진회는 자기에게 아부하는 양원이 밉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겨우 1년이란 시간이 지나자 진회는 양원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회는 어사를 시켜 암암리에 양원을 배척하려고 했다. 양원이 이 일을 알게 되자 눈물 콧물을 짜며 진회에게 애걸하였다. 그러자 진회는 그에게 콧방귀를 뀌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내대장부란 흉금이 넓어야하거늘 자네는 어찌 그 모양인가?"
 

"아니옵니다. 출신이 미천한 소인이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만 해도 대단히 만족하옵니다. 소인은 태사의 하늘과 같은 은덕을 입어 오늘날의 부귀를 입게 되었사옵니다. 저를 낳아 주신 생부모의 은혜가 크면 이만큼 크겠사옵니까? 이제 소인이 나리님을 떠나게 된다면 언제 다시 나리님에게 효성을 올릴 수 있사올지 소인은 그것이 슬퍼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가 눈물로 하소연하는 말을 들은 진회는 그가 아주 측은하게 보였다. 그러자 진회는 잠시 그를 같은 직급의 한직에 앉혔다가 3개월 후에 선주의 지사로 임명하였다. 훗날 참정 이약곡이 파면당했을 때 한 사람이 그에게 귀뜸 했다.
 

"나리님께서는 왜 양원처럼 한바탕 울지 않았습니까?"
 

하북인 이약곡은 성품이 정직하고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나서 껄껄껄 웃으면서,
 

"나를 능히 처참한다 하더라도 그 같은 거짓 눈물은 짜지 않을 것이오."
 

이 말을 전해들은 진회는 대노하여 이약곡을 강주로 유배를 보냈다.
 

어느날 진회가 병이 나서 조회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이때 여요필이 황제를 보좌하였다. 송고종이 그에게 기밀사무 몇 가지를  문의하였다. 여요필은 황제의 문의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진회의 병이 다 나아 조회에 나오자 송고종이 그를 꾸중했다.
 

"여요필이 일단 과인을 보좌하도록 결정했으면, 어떤 기밀 사무라도 그에게 알려줬어야 할 것이 아닌가?"
 

조회가 끝나자 진회가 여요필을 한쪽으로 끌었다.
 

"폐하께서 무슨 일을 물었소?"
 

이에 여요필이 대답했다. 진회는 성리를 시켜 공문을 가져다 일일이 살펴보았다. 그런데 공문은 이미 다 서명해 버렸던 것이다. 진회는 분통이 터져 여요필을 불렀다.
 

"이 공문들은 이미 대감이 다 서명한 게 아니요. 그런데도 왜 황제 앞에서 잘 모른다고 했소이까? 고의로 나를 배척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요?"
 

여요필은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라고 변명했다. 여요필의 변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진회는 이튿날 여요필의 직책을 파면시켜 버렸다.
 

단불은 젊었을 때 똑똑한 축이 못 되었다. 한번은 조회 때 진회의 상주시간이 너무 길자 단불은 지겨운 나머지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그리고 진회의 상주가 끝났을 때야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자기가 잠시 졸았다는 것을 안 단불은 갑이 더럭 났다.
 

그런데 황제가 오히려 괜찮다며 고향은 어디냐고 물어보았다. 대전 낭하의 뒤로 돌아온 단불은 그래도 어쩔 줄 몰랐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염불을 외우고 있던 진회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달관이 절을 세 번이나 올리고 나서야 진회가 고개를 돌려 단불에게 아는 척했다.
 

정사당으로 되돌아온 진회는 단불에게 총알 쏘듯 이것저것 물었다. 그러나 졸아 버린 단불은 연이어 묻는 진회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질 못했다. 결국 이튿날 단불은 경질되어 고향으로 되돌아 갔다.
 

탕사퇴가 추밀원에 있을 때 한번은 황제가 되돌아보면서 건성으로 몇 마디 말을 건네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이 조회에서 진회가 보고한 것과는 달랐다. 옆에 있던 진회가 다시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소인의 보고를 의심하신다면 앞으로 탕사퇴에게 문의하도록 하옵소서."
 

황제도 그러한 그의 건방짐에 노여움을 숨기지 않았다.
 

"과인이 왜 그걸 모르겠나. 탕사퇴에게 물을 것까지는 없소이다."
 

황제로부터 물러나온 진회는 탕사퇴를 보지 기분이 대단히 뒤틀렸다. 그는 언젠가 반드시 탕사퇴를 톡톡히 골탕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탕사퇴가 중병에 걸려 생명이 위급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진회에게 무슨 곤욕을 당했을지 모를 일이다.
 

옛날에 가난과 고생을 딛고, 열심히 노력하여 재상의 지위까지 오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재상이 되면서부터 날마다 묘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꼭두새벽에 일어나 마당에 있던 무거운 기왓장을 뒤뜰로 옮겨 놓았다가, 저녁이면 다시 마당으로 옮겨놓는 것이었다.  우연히 그러한 광경을 보게 된 친구가 어이없어 하며 물었다.
 

"아니, 이게 무슨 낮도깨비 같은 짓인가!.듣자하니 꼭두새벽 녘에 뒤뜰로 옮겼다가 저녁이면 다시 마당으로 옮겨 쌓는다고 하는데 무슨 까닭인가?"
 

그 말에 재상은 나지막하게 그러나 힘이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힘든 일을 일부러 함으로써 내가 어려웠던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기 위함이네. 지금의 편안한 생활에만 빠져 나태해질 정도라면, 하물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정치를 어찌 하겠는가? 파멸이 오는 것은 지식이나 경험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어려웠던 경험이나 그때의 일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네." 하고 말하며 기왓장을 계속 옮겨 쌓았다.
 
 
 
 
 
 
출처 : 사주명리 - cafe.daum.net/sajusaj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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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 조회수 : 1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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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보의 중요성 한국역학의 계보
자강 이석영 선생(1920-1983)
1920년 평안북도 삭주 출생
청주대 법대 졸업
사주첩경의 저자
한국역학교육학원의 창립자
前 한국 역학계의 태두(泰斗)
벽천 김석환 선생(1933-2016)
1933년 출생
중앙대 법대 졸업
故 자강 이석영선생님의 계승자
한국역학교육학원 원장
한국역학인총회 총재
前 한국 역학계의 태두(泰斗)
원제 임정환
성균관대학교 법학과 졸업
벽천 김석환 선생 사사
한국역학교육학원 강사역임
MBC 문화센터 강사 역임
한국역학인총회 사무총장
前 동방대학원 박사과정 교수
기억에 남는 상담 에피소드
역학인, 그 거짓과 진실 [349124] (4)
사주를 상담하여 줄 수는 있으나 교훈은 줄 수 없는 경우 [340757] (2)
사이비 역술인의 폐해 [234991]
사주를 무조건 부정하던 경우 [344654] (1)
사주를 보면서 해줄 말이 없는 경우 [350156] (2)
사주가 맞지 않는 경우들 [348211] (2)
아들의 외고합격 [365401] (2)
젊은 여성의 임신 [301302] (1)
재벌 회장의 사주 [356978] (2)
유명가수의 사주 [352575] (1)
보험설계사 [35409]
이혼상담(마인드가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381802] (4)
결혼(역학을 배우면 운명이 바뀐다.) [370735] (4)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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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평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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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중급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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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알고있는 역학상식
찾아오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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