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金活蘭]
양력 : 1899년 2월 27일
음력 : 1899년 1월 18일
시 일 월 년
戊 丙 丙 己
戌 寅 寅 亥
72 62 52 42 32 22 12 2
甲 癸 壬 辛 庚 己 戊 丁
戌 酉 申 未 午 巳 辰 卯
1899 2. 27 경기 인천 ~ 1970. 2. 10 서울.
교육자.
김활란은 제물포 배다리마을(현재 인천시 우각동)에서 김진연(金鎭淵)·박또라(朴萄羅) 씨의 8남매 중 일곱째(막내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899년이 기해년이었으므로 부모는 기득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녀가 일곱 살 때 인천의 내리교회에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으면서 어머니는 또라, 딸들은 엘렌·마리온·헬렌 등의 세례명을 갖게 됐고, 아버지가 세례명에 한자를 달아 애란·활란 등의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기득·헬렌·활란 등 3개의 이름을 갖게 됐다. '또 하나의 달'이란 뜻의 우월(又月)은 형부인 김달하(金達何-김활란의 형부, 밀정이었다는 설도 있음)씨가 지어 준 아호다.
모친은 박씨로 평북 의주 태생으로 열 살 때 모친의 아버지(김활란의 외할아버지)가 노름빚에 몰려 부잣집에 팔려감. 이 사건으로 모친의 어머니(김활란의 외할머니)가 몸져 누어 그길로 세상을 떠남. 모친은 18세에 주인 영감의 소실이 되어 딸 둘을 얻음. 이 후 소실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 집을 나와 홀아비가 된 부친(당시 아들 하나, 첫 부인과는 사별)인 김진연씨를 만나 재혼 함. 김진연씨와의 사이에 2남 3녀(총 2남 5녀)를 얻음.
평북 의주에서 농사를 짓던 김진연씨가 인천으로 이주한 것은 새 삶을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쇄국 정책을 고집하던 대원군이 1873년 실각하자 고종은 3년 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1882년에는 미국·영국·독일과 수호 조약을 맺었다. 부산·원산·인천이 잇달아 개항하고, 해외 문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항구들은 활기가 넘치는 기회의 땅이 되었다. 김진연씨는 인천의 큰 상점에서 경리일과 창고업을 돕고 있었다.
1906년 모친의 권유로 온 가족이 기독교로 개종함.
1907년 제물포에서 서울로 이사하여 이화학당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18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근무하였으며,
1919년 이화학당 재직중에 3·1운동을 맞았다.
1922년 7월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에 편입하였다.
1924년 6월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10월 보스턴대학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여 〈철학과 종교의 관련성〉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25년 여름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에, 이화여대 교수 및 학감 직을 맡음.
1927년 역시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2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 참석하였고,
1928년 미국 캔자스 시에서 열린 감리교 총회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는 등 종교·사회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4월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회의에 신흥우·홍병선 등과 함께 참석하여 일본대표와 논쟁을 벌여 찬사를 받기도 했다.
1930년 미국 콜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31년 10월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해서는 이화여대 부교장직도 겸했다.
1937년 『애국금차회』 발기인 및 간사 취임, 친일행위 본격 시작함.
1939년 4월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45년 문리과대학을 한림원으로, 음악·미술대학을 예림원으로, 의예과·간호과·약학과를 종합한 예과대학을 행림원으로 편성하였고,
1946년 8월 15일 종합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54년 모친 박또라 여사가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1961년 9월 30일 김옥길에게 총장직을 물려주고 명예총장과 이사장직을 맡아 이화여대에 대한 자체조사연구로부터 시작하여 이화 10년 발전계획을 추진하였다.
해방 후 구성된 교육심의회 위원으로 교육이념 분과에 참여하였고, 교육심의회보다 먼저 구성된 한국교육위원회에서 여자교육 부문을 맡아 여성교육 이념 확립에 힘썼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가서 적십자사 일을 보았고 이어서 공보처장직을 수행하였다. 그가 관련을 맺었던 단체는 50여 개에 달했는데
1922년에 창설된 기독교청년회연맹(YMCA), 1950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여학사협회, 1959년에 조직된 여성단체협회에서의 활동이 대표적인 것이다.
1960년 4월 19일 김활란 전도협회를 조직하여 교파를 초월한 범기독교적 운동을 전개하였고, 4·19학생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의 12년 집권이 끝났다. 당시 이대의 박마리아 부총장은 이승만 정부의 2인자였던 이기붕의 아내였다. 시위대에 쫓기던 그들 가족은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에 피신했다가 아들이 쏜 권총으로 집단 자살했다.
1964년 10월 16일 한국복음화운동의 기틀을 위한 발기대회를 열어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년 동안 추진했다.이것은 1968년의 새시대 복음운동으로 퍼져나갔다.
1963년 교육 부문 대한민국상, 필리핀에서 주는 막사이사이상(공익 부문), 미국 감리교회에서 주는 다락방상을 수상하였다.
1964년 5월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타임캡슐에 넣을 자료편찬의 교육 부문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65년 9월 대한민국 순회대사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활동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1970년 2월 10일 사망함, 당뇨와 동맥경화증을 앓아 온 그녀는 1월 중순부터 병세가 악화됐고, 운명하기 닷새 전 뇌일혈을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졌다.
대한민국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되었다.
2차 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남학생들은 학병으로 끌려가고 여학생들은 군수품 제작에 동원됐다. 지도층 인사들은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하고,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나가도록 독려하는 연설을 강요받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의 지시대로 글을 쓰게 하여 신문 잡지에 싣기도 했다. 유명 문화인들, 사회 지도자들, 명문 사학의 교장들이 주로 동원됐다.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 천성활란(天城活蘭)으로 이름을 바꿨던 김활란도 연설을 하고, 글을 썼다.
그녀의 자서전에는 연설을 하고 돌아와 실명 위험에 이를 만큼 심한 눈병을 앓으면서 "죄값으로 눈이 멀어도 달게 받겠다"고 자책하던 이야기가 나온다. 몇몇 학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면서 폐교를 감수했다. 그러나 그녀는 친일 연설을 하면서 학교를 지켰다.
호는 우월(又月), 초명은 기득(己得)이며, '활란'이라는 이름은 세례명 헬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1899년(고종 36) 인천에서 태어났다. 1907년(융희 1) 이화학당에 입학해 초·중·고등과를 거쳐 1918년 대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교사로 근무하다가 미국에 유학해 1924년 웨슬리언대학, 1925년 보스턴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1937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친일단체인 방송선전협의회·조선부인연구회·애국금차회 등에 참가하였고, 1941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및 참사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내선(內鮮) 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1939.3),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1942.12), 〈남자에 지지 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등의 글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는 한편, 〈여성의 무장〉(1941.12), 〈대동아 건설과 우리 준비〉(1942.2) 등의 제목으로 친일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1945년부터 1961년까지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장 겸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였고, 1950년 공보처장(公報處長)을 지냈다. 그 밖에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 이사장,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한국여학사협회 회장 등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고,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를 비롯하여 전후 수십 차례 국제회의에 참석하였다. 1963년 막사이사이상(賞) 공익 부문상과 미국 감리교에서 수여하는 다락방상을 수상하였고, 외교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1970년 1등 수교훈장이 추서되었다.
1936년 부교장 으로서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목적으로 주최한 사회교화간담회에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1937년 1월 황민화 정책을 철저히 하는 방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방송에도 참가하였습니다. 또한 1937년부터는 일제와 관련된 일회적인 모임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단체활동 즉, 1937년 1월 말에는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 인문제 연구회를 결성하였고, 중일전쟁이 터지자 손정규와 더불어 애국 금차회(일찍부터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귀족 부인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조직한 단체)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사회자로 활약하였다 합니다.
1938년 6월 20일 김활란을 단장으로 발단식을 올린 애국 자녀단은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 명 교복 처녀들로 이른바 총후보국의 내조적 역할을 다하기 위해 조직되었고, 강연의 내용은 징병제 독려에 관한 것으로 어머니의 위대한 힘에 의해 자식들을 황군에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논지입니다.
출처 : 사주명리 - cafe.daum.net/sajusaj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