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
양력 BC 551년 9월 27일 16시 (스타뚜에서 발췌)
음력 BC 551년 8월 27일 16시
時 日 月 年 乾命 (孔子)
甲 庚 乙 庚
申 子 酉 戌
84 74 64 54 44 34 24 14 4
甲 癸 壬 辛 庚 己 戊 丁 丙
午 巳 辰 卯 寅 丑 子 亥 戌
위 사주의 근거는 아래와 같습니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은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양력 9월 28일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공자탄신일로 널리 봉축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스승의 날'로 지정하여 국정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
<스타뚜>에서는 BC 551년의 음력 8월 27일이 양력 9월 27일로 나옵니다. 무인시라는 설도 있으나 도무사 생각은 갑신시가 맞는 것 같습니다.
중국의 저명한 학자들도 위사주로 공자님의 일생을 풀이합니다.
2. 그러나 자료를 검색해 보면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있습니다.
<노나라 양왕 22년(B.C551)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창평향 추읍(창평향 읍:지금의 산동성 곡부의 남동)에서 태어났다.>
아마 위글은 공자님 전기에 쓰여있는 글 같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을 보면 위와 같이 몇월 무슨일에 태어났다는 글이 많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옛날에는 저런 식으로 생일을 표시했나 봅니다.
문제는 스타뚜로 검색해 보면 BC 551년 11월에 경자일이 있는데 을유월이 아니라 정해월이라는 것입니다. 아래는 BC 551년 11월에 있는 경자일 사주입니다.
양력 : BC 551년 11월 26일
음력 : BC 551년 10월 28일
時 日 月 年 乾命 (孔子)
甲 庚 丁 庚
申 子 亥 戌
84 74 64 54 44 34 24 14 4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戊
申 未 午 巳 辰 卯 寅 丑 子
임수당령, 진사공망, BC 479년(73세-임술년) 사망.
아래의 공자님 생애를 보시고... 어느 사주가 맞는지... 연구해 보시기 바람니다...
노나라 양왕 22년(B.C551) 경술년 11월 경자일(9월 28일)에 창평향 추읍(창평향 읍:지금의 산동성 곡부의 남동)에서 태어났다. 성은 공씨요 이름은 구이며 자는 중니. 공자의 ꡐ자ꡑ는 존칭이다.
노나라의 군인으로 군공을 세우기도 했던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공자 나이 3세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 안징재 역시 공자가 10 여 살이 되었을 때 돌아가셨다.
세 살(임자년) 때 父親을 여의었는데 家勢가 기울어 葬禮를 치르기도 힘들었다 하고 18세 (정묘년) 때까지도 홀어머니를 모시느라 비천한 일을 전전했으며 15세(갑자년)에 이르러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다.
일정한 스승 없이 배운 공부가 나이 20세가 갓 넘었을 때는 나라에 이름이 알려 질 정도였고 벌써 제자를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다.
19세(무진년)에 결혼하고 20세(기사년)에 아들을 두었는데 그의 문헌에 자식의 자질이 부족한 것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보이는데 아마도 아들의 자질이 부족하여 속이 많이 상했나보다.
19세 때 창고 관리자(계리)가 되어 창고를 관리하는 한가지 한가지 일을 세심히 생각하여 공평하고 정직하고 명확하게 처리해 나갔다. 이어 성년식을 거행하고 집안 친척이 주선해 준 송나라 견관씨의 딸과 결혼했다.
20세에 목장 지기로 직장을 옮기고, 아들 ‘이’를 낳았다.
22세에 목장 지기를 그만두고 곡부에 사설 학당을 세워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에 배우고자 하는 이는 모두 받아들여 제자가 3천명에 이르렀다.
孔子 나이 24살 되던 해 紀元前 528년(癸酉年) 孔子의 어머니는 40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34세(계미년) 때에 周나라의 문서를 관리하는 벼슬로 있으면서 老子를 찾아 禮를 물었다고 한다.
昭公 25년(B.C 517) 갑신은 공자 나이 35세(갑신년)였는데, 소공이 제나라로 달아나 노나라가 혼란하니, 공자께서는 이에 제나 라로 가시어 高昭子의 가신이 되어서 景公에 통하였다. 경공이 尼谿의 토지로 공자를 봉해 주고자 하였으나, 晏영이 불가하다 하니, 경공이 의혹하였다. 공자는 마침내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공자는 40대말과 50대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定公 元年 임진은 공자 나이 43세(임진년)였는데, 계씨가 강하여 참람하고, 그의 가신인 陽虎가 난을 일으켜 정권 을 독단하였다. 그러므로 공자는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詩書와 禮樂을 닦으시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정공 9년 경자년은 공자 나이 51세(경자년)였다. 공산불뉴가 費邑을 가지고 계씨를 배반하고 공자를 부르자, 가고자 하였으나 끝내는 가지 않으셨다. 정공이 공자를 中都의 읍재로 삼으니, 1년 만에 사방에서 본받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司空이 되시고, 또 大司寇가 되시었다.
정공 10년 辛丑년(52세)에 정공을 도와서 제나라 군주와 夾谷에서 會盟하시니, 제나라 사람들은 노나라에게서 침략한 땅을 반환해 주었다.
정공 12년 계묘년(54세)에 중유로 하여금 계씨의 가신을 삼아 세 도읍의 성을 허물게 하고 갑옷과 병기를 거두게 하였는데, 맹씨의 집안에서는 成땅의 城을 허물려고 하지 않으므로, 포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정공 14년 을사년은 공자 나이 56세였다. 정승의 일을 攝行하여 소정묘를 베시고, 국정에 참여하여 들으시니, 3개월 만에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제나라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자와 악사를 보내어 저지하니, 계환자가 이것을 받았으며, 郊祭에 또 제사지낸 고기를 대부들에게 주지 않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셨다.
56세(을사년)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거의 12년에 이르는 천하철환(天下轍環)의 망명기간에 공자를 수행했다.
공자는 50세(기해년)에 이르러서야 易에 심취하게 되었는데 韋編三絶이라는 古事가 생길 정도이었으니 그가 易에 심취한 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때서야 공자는 知天命이라 하였으니 易을 통하여 하늘의 뜻을 깨닫게 되는 시기가 된다.
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인 顔濁鄒의 집에 主人을 정하시었다. 진나라를 가실 적에 匡땅을 지나니, 광땅 사람들은 양호라고 여겨 拘留하였었다.
풀려나자 위나라로 돌아와 남자를 만나셨다.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에 가시니, 사마인 환퇴가 죽이고자 하므로, 또 송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가서 司城貞子의 집에 주인을 정하시고, 3년 동안 거주하다가 위나라로 돌아오셨는데, 靈公은 등용하지 못하였다.
계환자가 죽을 적에 강자에게 유언하여 이르되 반드시 공자를 불러 등용하라 하였는데, 그 신하들이 저지하자 강자는 마침내 염구를 불러왔다. 초나라 昭王은 장차 書社의 땅을 가지고 공자를 봉해주려고 하였는데, 令尹인 子西가 불가하다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오시니, 이때 靈公이 이미 죽고, 위나라 군주인 輒이 공자를 얻어 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며, 염구가 계씨의 장사가 되어 제나라와 싸워 전공을 세우자, 강자가 마침내 공자를 불렀으므로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오시니, 실로 哀公 11년 정사년으로 공자 나이 68세였다.
孔子나이 67세(병진년)에 妻와 死別하게 되고 68세(정사년)에 이르러 노나라로 돌아온다.
69세(무오년)때 아들 ‘이’가 죽고
70세 B.C. 482년(기미년)에는 그가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이 또 죽었다.
B.C. 479년 4월 18일. 73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老年을 제자를 가르치며 詩經 書經 春秋 易經 등을 정리하며 보내다 73세(임술년)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치게 된다.
그전에 아들도 먼저 죽었으며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도 먼저 보내게 되는 슬픔도 있었다.
14년 간 주유천하 하면서 때로는 전쟁에 나가 승리하기도 했으나 도적에게 생명의 위협도 받는 등 결코 순탄한 인생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출처 : 사주명리 - cafe.daum.net/sajusaj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