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가 명택] 경남 거창 정온(鄭蘊 )종택
혁명 기상 충만한 强骨 집안
‘금색 원숭이의 정기가 뭉쳐 있다’는 뜻의 금원산(金猿山)을 배경으로 한 동계(桐溪) 정온 종택은 그 강강(剛剛)한 기세가 무림 고수가 살기에 적당한 집이라는 이미지를 준다. 바로 이 집에서 조선 후기 최대의 반란사건 주도자 정희량을 배출한 것을 우연한 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이은 영조가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점이 제기되었다. 그 증거로 역대 이씨 왕실의 남자들이 수염이 별로 없는 데 반해 영조는 이상하게 수염이 많아, 이는 결국 영조 어머니인 무수리의 미천한 신분과 관련되면서 영조가 이씨 왕통이 아니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셋째는 경종의 뒤를 이은 영조의 등장과 함께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고, 노론에게 밀려난 남인들과 소론(준소)들은 정권에서 완전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난을 일으켰다는 설이다.
넷째는 당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극심한 흉년이 계속돼 사람을 잡아먹는 상황에 이를 정도로 민심이 흉흉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민란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을 만큼 수많은 민란이 발생하고 있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여러 배경으로 인해 일어난 무신란은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라고도 하고 정희량(鄭希亮)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각종 반란사건의 수사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鞠案)’에서 무신란 관련 기록을 들춰보면 문건 타이틀에 이인좌, 정희량의 이름이 보인다. 동계의 현손인 정희량이 무신란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충신의 후손에서 일순간에 역적 집안으로 전락한 강동의 정씨들은 30명 정도가 사건에 연루되어 죽어야 하였고, 약 20년 동안 동네를 떠나 이곳 저곳에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아야 하였다. 한마디로 집안이 결딴난 것이다. 조선시대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 쿠데타에 실패한 역적이었으니까, 이후로 정희량에 관한 사실은 초계 정씨 족보에서부터 문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에서 철저하게 삭제되었음은 물론이다.
소설가 이병주가 그랬던가! 승자의 기록은 햇빛을 받아 역사로 남지만, 패자의 기록은 달빛을 받아 신화나 전설이 된다고. 정희량에 관한 내용도 마찬가지다. 강동 마을에서 구전으로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정희량에 관한 이야기를 후손인 정양원씨(鄭亮元, 62세)가 99년에 ‘강동(薑洞)이야기’라는 책으로 펴냈다.
정양원씨는 현재 사업체(成現商運)를 운영하는 사장이지만 십수년간 시간 나는 대로 자료를 찾고 현지를 답사하면서 정희량에 관한 자료와 정보를 꼼꼼하게 섭렵한 향토사학자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역적이었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새로운 시각에서 정희량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책을 펴냈다는 것. 이 책에는 정희량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나온다. 정희량은 어릴 때부터 인물이 대단히 준수하였고 두뇌가 비상하였으며 생각하는 것이 엉뚱하다 할 정도로 호방하였다고 한다.
정희량이 네댓 살쯤 된 어느 봄날 조부인 제천공이 어린 손자인 정희량을 안고 집 앞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때 마침 우측으로 바라보이는 금원산에 산불이 나서 대단한 기세로 타고 있었다고 한다.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그 연기 사이로 불꽃이 널름거리는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 품에 안겨 있던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 저 둥그런 하늘이 솥(鼎)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허허 고놈이! 하늘이 어떻게 솥이 될 수가 있겠느냐. 그래 하늘이 솥이라면 무엇을 할 것이냐?”
“만약 하늘이 솥이라면 저 불로 죽을 끓여서 굶는 백성들을 모두 먹이면 온 나라 안에 배고픈 사람이 없을 것 아닙니까?”
어린 손자에게 이 말을 들은 제천공은 손자의 생각이 기특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 그릇이 너무 크고 생각이 지나치게 거창하여 걱정스러운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정감록’과 풍수도참 사상
필자의 주목을 끄는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무신년 봄에 정희량이 거사를 하려고 하자 누나가 주역을 펴놓고 골똘히 괘를 풀어보았다. 정씨집 여자들은 주역을 공부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뛰어난 예지력을 갖춘 여성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 누나는 주역을 풀어본 뒤 동생 정희량의 손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히 큰 일을 할 명운을 타고났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니 조금 더 기다렸다가 금년 가을 나락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때가 천시(天時)에 맞다. 그때 하거라.”
그러나 상황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형편이라고 정희량이 대답하니, 누나는 “이것도 역시 우리집 가운이고 너의 명운이라 어쩔 수가 없구나. 지금 거사를 하면 너는 뒷날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무덤 없는 혼백이 될 것이다”라고 한탄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설들은 알고 보면 풍수도참(風水圖讖)에 관한 내용들이고, 한걸음 더 유추하여 보면 정희량 자신도 풍수도참적인 맥락에서 특별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후기 각종 반란사건의 이념적 기반 중의 하나가 다름아닌 풍수도참이고, 대표적으로 ‘정감록’이 조선시대의 그러한 풍수도참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정감록’이라는 이름이 공식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가 바로 무신란 때부터다. 혹시 무신란 주도멤버 중 누군가가 ‘정감록’을 비롯한 풍수도참설을 유포하여 민심을 움직이려 한 것은 아닐까? 정씨인 정희량은 혹시 자신을 정도령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지배했던 풍수도참적인 시각에서 보면 동계 종택의 풍수와 정희량이라는 인물의 출생은 몇 가지 점에서 부합되는 부분이 발견된다.
다소 어렵긴 하지만 이를 풀어보기로 한다. 태조산인 금원산의 정기를 받은 인물이 강동마을 정씨 집안에서 언젠가 한 명 태어나기 마련이다. 그 사람은 열두 띠 가운데 일단 원숭이해에 출생한 신년생(申年生)으로 범위를 좁혀볼 수 있다. 바로 금원산이 원숭이(申)의 정기가 뭉쳐 있는 산이기 때문. 그 다음에는 원숭이띠 중에도 천간(天干)에 임(壬)자가 들어간 임신년(壬申年)생 인물이 금원산의 정기를 받아먹을 것이다. 바로 동계 종택의 좌향이 임좌(壬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풍수의 이기법(理氣法)을 동원하면 종택 좌향의 임(壬)과 태조산인 금원산의 신(申)이 결합하면 임신(壬申)이 되는 이치다.
그런데 정희량은 역적이라고 해서 모든 기록에서 지워졌으므로 그 출생연도를 확인해볼 수 없다. 추리해 보면 정희량과 함께 난을 꾸민 이인좌의 나이가 무신란 당시 36세였고, 두 사람이 흉금을 터놓고 같이 어울렸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비슷한 연배였을 것이다. 또 기록에 따르면 무신년에 정희량이 큰며느리를 보았다고 돼 있는데, 당시 혼인 적령기가 17∼18세였음을 감안하면 정희량은 무신란 당시 37∼38세쯤이 아니었을까. 무신년을 기점으로 육십갑자를 소급해 올라가면 37세 나이는 임신년(壬申年) 생이다.
그 다음에 생각해볼 요소가 거사년인 무신년(戊申年)이다. 이 역시 원숭이해다. 원숭이띠가 원숭이해에 거사를 한 셈. 이러한 중복은 상서롭게 본다. 그런데 여기에 원숭이가 한 마리 더 첨가되어 세 마리 원숭이가 삼중으로 중복되어야만 제대로 힘을 쓴다고 본다. 전설에 따르면 주역을 잘한 정희량의 누나는 “나락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때 거사를 하라”고 정희량에게 충고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때가 음력 7월로 신월(申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희량은 그 말을 듣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복구된 명문가
초계 정씨들이 반란의 주모자를 배출하고서도 멸문을 당하지 않고 다시 집안을 복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가장 큰 이유는 동계와 같은 충신의 제사가 끊어지게 놔두면 안 된다는 사대부층의 여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영조 당대에 동계 제사가 허가된다. 이는 정희량에 대한 미움보다도 선조인 동계에 대한 존경의 염이 더 컸음을 나타낸다. 중시조인 동계의 명망이 없었더라면 이 집안은 무신란 때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한국 명문가는 중시조의 명망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당 정면에 정조대왕이 동계를 위해 직접 지은 어제시 현판이 그 복구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무신란의 여파로 20년 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정씨 집안을 다시 일으킨 인물은 영양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1800∼1860년)이다. 그는 피폐한 강동 마을을 거의 복구시켰으며, 현재 강동마을 정씨들 또한 대부분 정기필의 후손일 정도다. 그만큼 동계 다음으로 비중 있는 인물이다. 야옹 이후로도 계속해서 인물이 배출되면서 정씨들은 과거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사회 각계에서 활동하는 이 집안 후손들을 항렬별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종철(鄭鍾哲, 작고, 경남지사·서울시장 역임) 정종구(鄭鍾九, 작고, 동국대 농대학장 역임, 주정계의 권위자) 정종선(鄭鍾先, 유타대 박사, 미국 코닥사 선임연구원) 정종화(鄭鍾和, 고려대 교수) 정종진(鄭鍾珍, KBS 보도본부장) 정종욱(鄭鍾旭, 아주대 교수, 중국대사 역임), 정종흔(鄭鍾欣, 안양시 부시장 역임) 정도순(鄭度淳, 스위스대사) 정창순(鄭昌淳, 한일은행 전무) 정연순(鄭年淳, 무역진흥공사 본부장) 정용수(鄭龍秀, 검사) 정천수(鄭天秀, 연세대 교수, 벤처기업 사장) 정진수(鄭眞秀, 대웅제약 이사) 정준수(鄭俊秀, 한국통신 공보기획부장) 등이다.
현재 동계 종택의 15대 종손은 정완수씨(鄭完秀, 60세)이고, 종부인 류성규씨(柳星奎, 55세)는 안동의 저명한 가문인 전주 류씨 류치명(柳致明) 선생의 직계 후손이다. 안동의 전주 류씨들은 독립운동을 많이 한 집안으로 유명하다.
종손은 직장이 경북 영주에 있어서 거창 종택에서 거주하지는 못한다. 종손으로서 종가를 지키지 못한다는 부담감을 항상 가지고 있어 몇 년 안에 일이 정리되는 대로 종가로 돌아오려고 한단다.
그러나 종가로 돌아와서 사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우선 고택의 관리가 쉽지 않다. 1500평의 대지에 70칸 건물이 있는 저택을 쓸고 닦는 일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봉제사 접빈객은 더 큰 문제다. 저명한 고택이기 때문에 지나는 방문객을 비롯하여, 이곳 저곳에서 많은 손님이 항상 찾아온다. 알고 찾아오는 손님들은 모모한 분들이기에 소홀하게 대접할 수도 없다. 종손에게는 손님접대가 가장 큰 일이다.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든다.
고택을 유지하려면 한 달 생활비가 어느 정도 드느냐고 종손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500만원 정도는 있어야 기본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더구나 종손은 접빈객을 하면서 고택을 관리해야 하니 직장을 갖기가 불가능하다. 보통 사람이 직장도 없이 매달 500만원의 비용을 충당하기는 쉽지 않다. 이 집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명한 종손들이 직면한 공통적인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재산이 아주 많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종손들이 집을 지키면서 살기가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요리솜씨로 유명한 14대 종부
동계 종택은 종손인 정완수씨 부부보다 종손의 어머니이자 14대 종부인 최희씨(崔熙, 75세)가 유명하다. 14대 종손으로 거창 교육장을 지낸 정우순씨(鄭禹淳)가 5년 전 타계한 후 혼자 이 넓은 집을 지키고 있다. 안채 뜰 앞에 보랏빛으로 피어 있는 꽃잔디도 할머니가 정성스레 가꾼 것이다.
최희 할머니는 요리솜씨로 유명해서, 요리잡지나 여성잡지에서 할머니 요리법을 자주 취재해 간다. 한국 상류층의 전통 요리법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친정은 한국 최고의 부잣집이자 12대 만석꾼을 지낸 경주 최부잣집이었으니 그 안목과 솜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최희씨는 최부잣집의 현재 종손인 최염씨의 누나이기도 한데, 필자는 동계 종택을 방문하기 전 최염씨를 통해 미리 연락을 해놓은 터라 할머니가 손수 준비한 저녁식사를 안채에서 맛보는 기회를 가졌다.
음식 맛은 전체적으로 담백했다. 명가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동행한 농심라면의 최경부 소스개발 전문연구원은 이 집의 간장맛에 찬사를 보낸다. 간장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거의 없으면서도 맛은 고소하고 담백하다는 평가다.
할머니에게 그 비결을 물어보니 고택 전체의 구조가 일조량을 많이 받는 위치에 있고, 거기에다 금원산에서 내려오는 물맛이 합쳐져서 그런 것 같다는 설명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집의 물은 서출동류의 격조 있는 물이다.
반찬 중에 수란과 육포도 빼놓을 수 없다. 수란은 종가의 주안상에 꼭 오르는 음식이라고 한다. 달걀을 끓는 물에 데친 다음 고소한 잣국물에 띄운다. 보기에도 깔끔하면서 영양가가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통예절 전문가인 이연자씨가 쓴 ‘종가이야기’에도 이 집의 수란이 소개되어 있는데, 보통 먹는 계란찜이나 계란 프라이하고는 차원이 다른 음식 같았다.
육포 또한 별미. 나는 산에 갈 때마다 비상 식량으로 육포를 챙기기 때문에 평소 이 분야에 관심이 많다. 할머니에게 들은 비법은 이렇다. 쇠고기를 물에 담가 놓아 피를 뺀 뒤 햇볕에 말린다. 이때 모기장을 쳐 파리가 붙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포를 뜰 때는 손으로 직접 떠야 맛이 있다. 물엿, 설탕, 진간장, 후추, 조미료 약간을 넣는데, 단 마늘은 넣지 않는다고 한다.
잠은 사랑채에서 잤다. 사랑채에는 ‘모와(某窩)’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1909년 의친왕 이강(李堈;1877∼1962년) 공이 이 집 사랑채에서 약 40일간 머문 적이 있다. 이강공은 구한말 승지를 지낸 이 집 종손 정태균(鄭泰均)과 한양에서 친하게 지낸 사이였기 때문에 이 집을 찾아왔으며, 그때 남긴 친필이 ‘모리의 집’이라는 뜻의 ‘모와’다.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의친왕이 사랑채에 머물고 있을 때 거창 인근은 물론이고 남원, 무주, 진안, 장수에서까지 사람들이 와서 임금님을 보겠다고 뜰 앞과 문 밖에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몇 년 전에는 이강 공의 아들인 가수 이석씨가 종택을 방문하였다. 아버지가 머물렀던 사랑채에서 자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온 것이다. 사랑채에 들어온 이석씨는 감회어린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아버지가 요를 깔고 자던 방바닥에 대고 몇 번이나 절을 하더란다.
종택 사랑채의 하룻밤은 상쾌한 숙면이었다. 7층 아파트의 잠자리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실감하겠다. 자고 나니 몸이 부드럽지 않은가! 아침을 먹기 전에 근처에 있는 수승대까지 산보를 나갔다. 거리는 1km. 뒷동산의 산길을 넘어가는 데 20분 정도 소요되는 적당한 거리다.
솔잎 냄새와 새소리를 들으면서 당도한 수승대도 절경이다. 계곡 한가운데 소나무 사이로 거북 모양을 한 커다란 바위(岩龜臺)가 신비롭게 놓여 있고, 그 꼭대기에는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돌로 된 좌석이 마련되어 있다. 신선은 바로 이런 곳에서 세월을 보내는구나. 집에서 불과 20분만 걸으면 산수화 속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으니 더 이상 무얼 바랄 것인가!
출처 : 한국의 명가 명택 (경남 거창 정온 鄭蘊 종택) - cafe.daum.net/dur6f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