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동학 이대교주 최시형(崔時亨)의 명조이다 .
丙 壬 壬 丙
午 寅 辰 戌
최시형 이라 하는 銜字(함자)物象(물상)은 好好好一了百了(호호호일료백료)不 雷驚何須風掃(불시뇌경하수풍소) 라 하는 物象(물상)에서 得意不可再往(득의불가재왕)이라 하는 物象(물상)으로 변형하여지는 모습이다 思想(사상) 이념을 크게 통달 깨우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보는데 그렇게 남자라면 '하하'거리고 여자라면 간드러지게 웃울 정도로 크게 깨달음을 얻는 모습을 '얼시구 좋고 좋고나 잘한다 잘해' 한가지를 깨우치게 됨에 백 가지를 깨닸게 되었구나 이런 것을 갖다가선 得道(득도) 깨달음이라 한다 所以(소이) 東學(동학)의 眞髓(진수) 人乃天(인내천) 思想(사상)을 제대로 理解(이해) 하였다는 그런 말이리리라
그러니 먼저 솔선수범을 하여선 餘他(여타)의 歸鑑(귀감)을 보일 내기이지 어찌 풍파가 淸掃(청소)를 하여줄 때를 기다릴 것인가 이런 취지가 된다 할 것이다 인간 사회의 波高(파고)가 높아선 비바람이 몰아치는 激浪(격랑)이 일어날 때를 바라지말고 스스로 솔선수범 하여선 그 비바람을 잘 잠재워선 民衆(민중)의 恨(한)을 달래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런 의미도 된다할 것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 그렇게 下民(하민) 民草(민초)가 塗炭(도탄)에 허덕일 때 그것을 교묘히 활용 하여선 각종의 似而非(사이비) 理念(이념)이 만연하던 時節(시절)이 었는데 濟世救民(제세구민) 한다는 迷名(미명)아래 民衆(민중)을 宣動(선동)하여선 더욱 민중을 도탄에 허덕이게 하였던 것이고 당시의 사상가들의 책동이 非一非再(비일비재) 하였던 그런 시절이 었다 할 것이다
모든 사상이념의 胎動(태동)이나 시발점은 이렇게 모깃불을 피우듯이 시작이 되지만 그것이 오래되어 관록이 붙는다면 그 가르침 종교로 탈바꿈하게 된다할 것이다 자기의 포부를 실현할 것을 얻는 것을 丈夫(장부)가 뜻을 얻는다 하는 것인데 그렇게 꿈의 實現(실현) 理想(이상)의 나래를 펼칠 것을 얻었는데 어디 딴데로 재벌 移動(이동)할 이유가 있겠느냐 이다 그래서 그 西學(서학)에 대항하는 그 맞서서 東學(동학)이라 하는 것을 창시한 최제우 일대교주 바튼을 이어받는 이대 敎主(교주)가 되어선 그 교세를 크게 떨치었다할 것이고 그 숫한 고난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할 것인바 당시 東學徒(동학도)들의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할 것이다 열강의 각축전 속에 나라가 크게 일본의 검은 야욕에 집어 삼켜 질 적에 거기 대항하여선 항거하고 항쟁하였다는 것은 기리 靑史(청사)에 남을 일이라 할 것이다
崔時亨(최시형)이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로 몰려선 殉敎(순교) 하였다 할 것이다
此命條(차명조)는 그렇게 크게 깨달음을 얻어서는 다른 이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構造(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것인데 壬丙(임병) 兩 (양충)하여선 크게 깨달은 현상이 되어선 그것을 壬(임)이라 하는 것은 敎育(교육)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그렇게 가르침을 내리는 상황이 된다할 것이다 아주 蓮花臺(연화대) 꽃 속에 들어 있는 부처님을 연상하는 사주 명조라 할 것이다
崔時亨(최시형)이라 하는 漢文(한문) 物象(물상)은 一竿明月釣淸風(일간명월조청풍)이라 하는 物象(물상)으로서 하나의 낚시 대를 갖고선 밝은 달 아래서 맑은 바람을 낚어 올린다는그런 내용으로서 아주 고결하고 깨끗한 것을 그렇게 낚는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서 신선이나 한가롭게 앉아선 낚시질하는 강태공을 연상하게 하는 것으로서 무사 태평함으로 귀결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여 보는 것인데 그 崔時亨(최시형)漢文(한문)趣旨(취지)는 어느 한 시대를 가장 높다할게 형통시킨다 그 時期(시기)라하는 것은 그 맞춘다하는 의미도 있음인지라 그렇게 때맞춰선 그 형통을 시킨다는 그런 내용도 된다할 것이다 사주 命條(명조)에서는 그 時柱(시주)가 그렇게 형통하는 가장 좋은 배열이다 이렇게 도 볼수가 있다할 것이다 * 東學(동학)이라하는 道(도)를 낚는다는 의미도 된다할 것이다
大定(대정)易象(역상)으로는 1921로서 天澤履卦(천택이괘) 初爻動作(초효동작) 소박떼기 걸음 걸이가 된다 혼자 간다 獨身主義(독신주의)자이다 이런 내용이다 暗鬱(암울)한 시대상황에 그 誘惑(유혹)하는 여러 잡다한 貪慾(탐욕) 스러운 것에 汚染(오염) 물들지 않고선 자기가 뜻하는 바의 길이 바른 길이라 하고선 그 길을 혼자 걸어간다는 것이다
象(상)에 말하데 素履之往獨行願也(소이지왕독행원야)라 = 所以(소이) 소박 떼기 조졸한 걸음으로 추진하여간다는 것은 그 홀로 행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일 세라 하고 있다 高潔(고결)한 精神(정신) 마음가짐 자세로 그렇게 홀로 正道(정도)를 지키면서 간다는 그런 내용이리라
다 이러한 홀로 가는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 시대상황을 본다면 아주 암울한 배경 明夷(명이)를 깔고 있는 天水訟(천수송) 初爻(초효) 所以(소이) 그 訟事(송사) 실랑이 오래가지 않는다 하는데서 動(동)해 오는 모습인자라 그러므로 홀로 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분은 그 用涉大川(용섭대천)이라고 아주 커다란 使命(사명)을 맡는다하더라도 너끈히 잘 해낼 수 있는 그런 謙謙君子(겸겸군자)라는 것이리라 그만큼 아주 무르익어선 고개를 푹 수그리는 아주 최고로 자신이 낮다하는 그런 모양새를 그려주는 謙虛(겸허)한 자세의 마음가짐 收容能力(수용능력)이 큰 빈 웅덩이 처럼 생긴 모습 산이 꺼꾸러 쳐박히면 빈 웅덩이가 될 것이 아닌가 이다 소이 높은 산이 땅보다 낮다하는 것은 그 逆(역)으로 된 산의 생긴 모습인지라 그 웅덩이가 진 것이 아닌가 이다 그러니 그러한 웅덩에는 어이 물이라 하는 德目(덕목)이 고여들지 않겠는가 이다
이런 고여 드는 덕을 收容(수용)하는 모습은 아주 그 包容(포용)姿勢(자세)가 바른 모습이라는 것이리라 하나를 보면 열 가지를 알수가 있다고 그 조촐한 걸음을 걷게되는 원인은 그 社會(사회)時代(시대)環境(환경) 背景(배경)이 매우 암울한 時期(시기)였다는 것이리라 그 明夷卦(명이괘) 初爻(초효)가 되는 것인지라 이제 어둠이 깔리기 시작되는 모습에서 그 밝을적에 所任(소임)을 다 이루고선 休務(휴무)休職(휴직)休暇(휴가)상태를 얻어서는 그 쉬러 고향이나 妻家(처가)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그런 귀향길 이라는 것이리라 그런 시기를 맞이하여선 그 歸家(귀가)道中(도중) 그 유혹하는 손길이 뻗쳐 진다는 것이다 밝은 날에 자기 맡은바 사명완수 하느라고 남녀간 사랑 놀이할 餘裕(여유)가 없었던 터라 그에 대한 精氣(정기) 充滿(충만)함을 보고선 見物生心(견물생심)을 일으키는 誘惑(유혹)의 魔手(마수)가 어이 뻗쳐오지 않을 것인가 이다
아주 精氣(정기)充滿(충만)한 丈夫(장부)가 休暇(휴가)를 맡아선 歸家(귀가) 길에 그 路中(로중)에서 아릿다운 여성이라 하는 꽃에게 誘惑(유혹) 당하는 모습인지라 그 誘惑(유혹)하는 말씀이 서방님께서 일하시느라고 그 남녀간에 情(정)이 멀었을 것인데 [* 初九(초구) 明夷于飛(명이우비)에 垂其翼(수기익)이니 君子于行(군자우행)에 三日不食(삼일불식)하야 有攸往(유유왕)에 主人(주인)이 有言(유언)이로다 象曰(상왈)君子于行(군자우행)은 義不食也(의불식야)라 하고 있는데 = 초구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는 그 날개를 드리우고 잘 접다시피 하여선 날아가는 모습이다 어둠 속에 날개를 다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깃(날개] 이라 하는 것은 그 情熱(정열)의 魂(혼)을 사르는 機具(기구)인 것이다 그 대낮 처럼 날개를 활짝 펼치고선 훨훨 飛翔(비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리라(나랏일 보는 정치 철새를 말하는 것임) 君子于行(군자우행)이라 하는 것은 "그 使命(사명)받은 일을 하실 적에 三日(삼일)간 그러니깐 그렇게 긴 期間(기간)동안 不食(불식) 所以(소이) 禁慾(금욕)生活(생활) 하시었지 않았습니까" 이런 말이 된다 할 것이고 그러니 "저가 음식상 차려 노았으니 잡수어 보시라 하는데 잡숫지 않는 이유는 무슨 까닭이십니까" 이런 내용이 일을 추진하는 자 有攸往(유유왕) 主人(주인)有言(유언) 所以(소이) 우리같이 遊戱(유희)하자 일을 推進(추진)하는 바의 그 主幹(주간)하는 자가 말을 하게된다 이런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象(상)에 말하데 군자가 그 도리를 지켜선 일을 행하실 적에 禁慾生活(금욕생활)한 것은 의리를 지켜주기 위해 유혹의 음식을 먹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풀이가 되는데 義(의)를 지켜준다는 것은 자기를 오기를 그리워하는 正室(정실)婦人(부인)한테 그 의리를 지켜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리라 이런 내용이 되는 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이렇게 길게 말을 하는 것은 그 易(역)의 類推(유추)방향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를 말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없다면 나중에라도 易(역)을 배우고선 그 類推(유추)풀이를 제대로 하겠느냐 이 다다 그래 노파심에서 하는 것인 것이다 이런 원리를 해설하지 않고선 내 머릿속에 靈覺(영각)이 그렇게 풀이하여선 類推(유추)한 것만 갖고선 적어 내린다면 그 읽는 자가 신기하게만 느껴질 것이 아닌가 이다 그래선 迷信(미신)시하거니 이렇게 된다는 것이라 그러므로 이렇게 자세하게 자꾸만 설명을 하게되는 것이다 필자도 硏究(연구)중이지만 필자의 글을 보는 자들로 연구 탐구하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여러 말로 변죽을 울리게 되는 것이다 그냥 남 풀어 논 것 읽기만 한다면 그 공부에 큰 덕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구하고 탐구하라는 것이다 ]
* 이렇게 저의 肉身(육신)을 맛있는 음식으로 여기고선 잡수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유혹을 하여도 그 正人君子(정인군자)歸家(귀가)길에 든 남자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리라 그만큼 사회배경이 암울하고 그 서로간 어떻게든 잡아 먹지 못해 으르렁 거리는 표현을 그 여자의 유혹으로 보았다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런 것을 다 뿌리치고선 高潔(고결)한 자세로서 자기 갈 길을 간다는 것이 바로 조촐한 걸음걸이로 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리라 理由(이유)는 그 이제 새로 날이 밝아 오면 그 고향집에서 내가 돌아오길 학수고대하는 그립던 님을 만나보게 될 것임으로 서니라 그 하루 밤의 암울한 시기가 아마도 일제 탄압기 三十六(삼십육)년을 지나고 해방 후 여러 격동기를 지나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여명이 밝는다는 것은 오늘날의 아름다운 문화번영 발전을 가리키는 그런 말이리라 이러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선 그 그립던 님과 짝을 맞추는 모습이라는 것이리라 所以(소이) 이러한 세상이 그 나를 학수고대하고 기다리던 고향집의 정실부인이라는 것이리라 이런 자와 결합을 해야지 암울한 속의 誘惑(유혹)魔手(마수)에 걸려 들일이 있겠느냐 이 다다
[남접 북접 해선 녹두장군 전봉준이 그렇게 그 동학 亂(난)을 일으킬 시기가 적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그 시대는 암울한 시대상황인데 그 願(원)하는 것을 얻겠느냐 이며 결국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그런 자로 몰리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가 포함된 모습이라 할 것이다 민초가 못 살겠다 아우성치는 모습 그래선 세상 뒤잡아 엎자하는 상황이 도리혀 時勢(시세)에 순응하지 못하고 狂的(광적)으로 조종하려는 그 魔手(마수)가 뻗은 것에 놀아난 모습이 되었다는 것이리라 단편적으로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말 몰이는 할 수가 있는 것이다 ]
그래서 그 혼자 바른길을 행하면서 혼자 가길 원한다는 것이리라 이렇게 마수에 떨어지지 않는 재목인물을 아주 좋은 동량감 인지라 그 어려운 임무를 맡겨도 너끈히 잘 해낼 것인지라 그래서 그 召命(소명)이 東學(동학) 二代(이대)敎主(교주)라 하는 召命(소명)을 받았다는 것이리라 그래서는 그 시대의 많은 민중들의 가르침을 주는 선봉장이 되어선 도탄에 허덕이는 민중의 등불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리라 이제 머지않아 새로운 날이 우리에게도 밝아올 것이다 그때를 위하여서 民草(민초)들이여 - 그 바른길로 나아가자 이렇게 외쳤을 것이고 좀 苦難(고난)의 시대라 그 견디기가 고통스럽더라도 이 허물을 벗어치우는 좋은 시대가 앞으로 다가올 것인지라 그 시대에 태어나는 우리 후손들을 위하여선 아주 좋은 기름진 밑거름이 되어주자 이런 식의 그 설교 동학의 원리를 가르침을 주었을 것이라는 것이리라 輪回(윤회)原理(원리)를 따른다면 자꾸 거퍼 태어날 것인지라 시대의 암울한 것에 고통을 받은 자가 다시 좋은 환경으로 태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 그렇게 되면 아주 좋은 해탈을 구가하다간 여한 없는 영화를 누렸는지라 다시 훌훌 벗어 던지고선 그 좋은 경계로 간다 할 것이리라
이래서 이분한테의 所以(소이) 往无咎(왕무구)는 그 敎主(교주)로서의 책무를 완수하는 성향을 그려주는 것인지라 그 서로가 좋아 하려다간 맞지 않다 하여선 소박 맞고선 내쫓김 당하여선 혼자 가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리라 天澤履(천택이) 初爻(초효)는 小畜(소축)上爻(상효) 아주 풍요로운 것이 顚覆(전복)된 상황인지라 그렇게 참말로 먹을 것이 별로 없고 고달픈 상황을 그리는 것이 된다 할 것이다 三者(삼자)적 考察(고찰)로서는 그 小畜(소축)上爻(상효) 아주 풍요로운 것을 가진 자로 譬喩(비유)되는 것인지라 그 敎主(교주)지위가 상당하게 남이 당시에 보기에는 그 많이 좋은 것을 가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할 것이다
所以(소이) 不請客(불청객) 三人(삼인)이 올 정도로 가진 것이 많고 맛있는 식당 구수한 냄새 향기를 날리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이 고객이 찾아들지 않을 것인가 이다 그래서 그 不速之客(불속지객)三人(삼인)이 어슬렁 거리고 찾아드는 性向(성향)이라 할 것인데
道談(도담)德談(덕담)이런 것이 모두 靈覺(영각)들의 음식으로서 그 말 잔치가 벌어지는 화려한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할 것이다 訟事(송사) 오래가지 않는 것은 고객이 음식 얼른 먹고 일어서는 것이거나 그렇게 遊戱(유희)하자고 유혹하는 손길에 마다 뿌리치는 것이 그 訟事(송사)오래가지 않는 모습 베겟 머리 情事(정사)가 오래가는 것이 訟事(송사)오래 가는 것인데 그런 짓 하지 않겠다고 툭툭 털고선 혼자 일어나선 獨步(독보)로 행하겠다는데 어이 그렇게 실랑이가 길 것인가 이런 내용인 것이라 아마도 이분은 그렇게 해선 그 道(도)를 지키고 正室(정실)부인을 만나기 위하여선 陰陽(음양)亂雜(난잡)한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참다운 道人(도인)이라 할 것이다
丙 壬 壬 丙
午 寅 辰 戌
兩壬(양임)을 兩丙(양병)이 양쪽에서 到 (도충)하여 안고 있는 모습이다 소
이 그 가르침[壬(임)]을 크게 만들어 노은 모습 이다 그 敎主(교주)라는 것이
다
더군다나 地支(지지)에 火三合局(화삼합국)을 짓고선 그 庫門(고문)을 到 (도
충)시키는 모습이라 그 火局(화국)勢(세)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래선 훨훨 불
이 타는 속에 兩壬(양임)이들은 모습인데 그 水庫(수고)의 月(월)支(지)에 근
을 두고 있는 모습인지라 그 兩壬(양임)도 만만찮은 勢(세)가 되었다 큰 가르침
으로서 그 가르침을 받아 먹을 대상 火局(화국)을 아주 크게두었다는 표현이
다 兩丙(양병)이 兩壬(양임)을 두둘겨 패니
그 汚濁(오탁)한 세상을 들깨우고 세탁하는 형태이라 그래선 그 寅辰(인진)方局
(방국)으로 食傷(식상)을 내려선 그 火局(화국)으로 銳氣(예기)를 뻗쳐선 그 火
局(화국)이 또 兩丙(양병)을 꽃을 피운 가운데 들은 모습인지라 고만 아주 부처
님 같이 꽃 가운데 좌정한 모습이요 그래서 세상 만인에게 그 가르침의 덕화를
내리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
* 최시형 [崔時亨, 1827~1898]
요약
조선 후기 동학(東學)의 제2대 교주(敎主).
본관 경주(慶州)
호 해월(海月)
별칭 초명 경상(慶翔)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경북 경주
본문
본관 경주(慶州). 호 해월(海月). 초명 경상(慶翔). 경주 출생. 가난한 집안에
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한때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했다.
1861년(철종 12) 동학에 입문, 1863년 초대 교주 최제우(崔濟愚)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되었다. 64년(고종 1)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太白
山)에 은신,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 ·울진(蔚珍) 등지에서 포교에 힘
썼다. 1871년 허락도 없이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
개, 영해(寧海)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탄압이 강화되자 소백산(小白山)에 피
신했다.
그 후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주요 경전(經典)을
발간, 교의(敎義)를 체계화했으며, 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탄압이 완화되
자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 조직을 강화했
다. 92년 손천민(孫天民) ·손병희(孫秉熙) 등의 주장에 따라 교조의 신원, 포
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도관찰사에게 요구했다.
1893년 2월 제2차로 각 도의 동학 대표 40여 명을 모으고 그 소두(疏頭)로서 박
광호(朴光浩)를 내세워 왕에게 직접 상소,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의 선처를 약속받고 해산했으나 시행되지 않자, 다시 보은(報恩)의 대
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을 시켜 교조의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종교의 자
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
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 우선 경상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 등 탐관을 파면하자 자진 해산했다.
1894년 고부 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북접(北
接) 산하 동학도를 궐기시켜 호응했으며, 9월 전봉준이 일본군 상륙과 정부의
요구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재기포(再起包)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
를 명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논산(論山)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
했다. 관군 ·일본군의 혼성군과의 공주(公州)싸움에서 참패하고 또 장수(長
水) 등지에서 연패하여 피신했다가 98년 원주(原州)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
송, 처형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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