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청나라 건륭황제의 명조다 銜字(함자)는 홍력[弘曆]이다
丙 庚 丁 辛
子 午 酉 卯
物象(물상)이 참 요상한데 67과 66이라, 67은 不能(불능) 이라 하고 , 66은 可也(가야)라 한다
같이 붙쳐 보면 不可能也(불가능야)라하고 있는데 얼른 들어봐 선 좋지 않은 말씀 가능 하지 않다는 능력 없는 所有者(소유자)라 하는 말로 들리 겠지만 漢文(한문)은 孤立語(고립어)라 그렇게 해석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보다 더 능가 하는 자가 없다 이렇게 해석이 되는 것이다 也(야)는 패륵 君主(군주)라는 의미이다
淸(청)나라 皇子(황자) 序列(서열)이 패륵(貝勒)으로 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차츰 단계를 밟아선 패륵,군왕,친왕으로 올라 간다,패륵을 尊稱(존칭)해서 불르는 말이 貝勒也(패륵야)로 안다
그러니깐 皇子(황자)中(중)에 이보다 더 능가하는 이가 없다 이렇게 해석이 되는 것이다
사주 命條(명조)는 분명 僞作(위작)이기 쉬우 리리라
生前(생전)에 好色漢(호색한)으로 비춰 보이기 위해선 子午卯酉(자오묘유) 四正方(사정방)帝旺(제왕)위 桃花(도화)를 깔아 논 모습인데 물상이 皇帝(황제)에 썩 맞는 物象(물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大定(대정)易數(역수)는 특이 해선 2022이로서 2자 숫자 세개와 공으로 이뤄진 모습이다 兌爲澤(태위택)上爻(상효) 引兌(인태)인데 所以(소이) 借用(차용)해 와서는 그 要求(요구)하는 剝兌(박태) 마누라 사랑을 얻는데 쓴다
가지건 환락 오락을 즐기는 형태로 된다 할 것임,
歸妹(귀매) 五爻(오효)帝乙歸妹(제을귀매)가 剝兌(박태)인데 주변머리 없는 선비가 引兌(인태)가 되어선 그렇게 즐거움을 借用(차용)이나 誘導(유도)해 와선 剝兌(박태)를 달래주는 모습 所以(소이) 하늘 上帝(상제)님의 딸을 妻(처)를 삼고선 달래는 모습 上帝(상제)님의 딸을 妻(처)를 삼앗다는 것은 천하를 財性(재성)으로 두었다는 것인데 소이 천하를 거느린 帝王(제왕)이라 하는 의미도 된다할 것이다 한집안의 首長(수장)家長(가장) 역할이기도 한 것이다
[兌爲澤卦(태위택괘)는 단단한 金石類(금석류)로 보 는수가 許多(허다)함으로 그 두 개의 雌雄(자웅)맷돌로도 譬喩(비유)되는데 ]
이런 의미 인데 乾豆(건두)를 만드는데 기구로 되어진 맷돌 윗 맷돌 짝이 되는 모습이다 顚覆(전복)交互(교호)田獲三品(전획삼품)의 乾豆(건두)이다 ,所以(소이) 巽爲風卦(손위풍괘) 사효를 말함, 아래위 맷돌 짝이 사랑행위 맷돌을 돌림으로 인해서 그 두부가 만들어지는 콩이 갈리게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남자 구실을 하는 숫 맷돌 짝이라는 것이리라 두부라 하는 것은 가공된 음식으로서 그 좋게 만들어 먹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기능 보유를 말하는 것이다 맷돌이라 하는 의미는 소이 좋은 加工(가공)을 하여선 만들 수 있는 기능 보유자 그러니깐 세상을 아름답게 잘 旣存(기존)에 것을 갖고선 꾸며선 아름답게 할수 있는 능력 보유자라 하는 말이 된다 할 것이다
그 동작하여 들어오는 모습을 본다면 그 天澤履(천택이)上爻(상효) 두루 사방을 돌아봐선 원만하여진 모습이라면 으뜸코 길하다는 것으로서 그 할아범의 位相(위상) 所以(소이) 한집안의 어른 가장 위에 首長(수장)을 의미하는 位相(위상)이 되는 것이다 그 대칭 손녀딸의 재롱을 보는 것과 같은 형세로 음양이 對置(대치) 되어 있는 모습이기도하다 乾龍(건룡)이 乾(건)은 老人(노인)데 所以(소이) 老龍(노룡)이 되어 있는 모습인데 老熟(노숙)한 龍(룡)이기도하지만 그 노숙하다 못해선 쇠진하여가는 병들은 룡이 되는 것이라 할 것인데
그래서 그 應爻(응효) 立場(입장)으로서는 그 싱싱한 美姬(미희)들 입장인지라 그 병든 룡이 비를 주는격 雲雨(운우)情事(정사)에 흡족함을 받지 못하는 그런 처지의 미희들이 되어진 모습이라는 것인데 그 많은 여성들과 놀아나다 보니 그 동원된 여성들의 입장으로서는 남자를 꿈에 떡맛 보듯 할 것인데[황제를 날마다 자기혼자만 품지 못할것이 아닌가 이다] 그 흡족한 雲雨(운우)情事(정사) 사랑에 비를 맞는다 할 것인가 그만큼 이분은 할아범의 위상으로서 많은 미희 여성들을 거느린 위치라는 것도 된다 할 것이다 그 관찰하는 자의 位相(위상)이나 환경등 그 레벨 立地(입지) 따라서 易象(역상)이 해석이 돌아가는 것이지 무조건 하고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類推(유추)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니다
上九(상구)는 視履(시이)하대 考祥(고상)其旋(기선)元吉(원길) = 上爻(상효)氣(기) 作用(작용)의 그 밟는 상황을 관찰할 것 같으면 상서로움을 相考(상고)하길 그 두루 사방으로 으뜸코 길하다고 한다 하고 있다 이런 것은 사람이 그 승천할 적에 사용되는 말이다 인생을 원만하게 살아 온 자가 그 죽음을 임박하던가 이미 죽어선 하늘에 오를 적에 그 지나온 足跡(족적)을 살펴 보건데 그렇게 세상 원만하게 잘 살다 간 것을 표현하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象曰(상왈)元吉在上(원길재상) 大有慶也(대유경야) 象(상)에 말하데 크게 길한 것이 上(상)에 존재한다 함은 큰 경사로움 있음 일세라 하고 있다
兌(태)의 上爻(상효) 속상은 艮爲山(간위산) 上爻(상효)로서 敦艮(돈간) 所以(소이) 鳴謙(명겸)위치 그 아주 결실이 무르익어선 濃艶(농염)하다 못해 落果(낙과)될 지경이라는 것으로서 乾隆(건륭) 皇帝(황제)시절이 淸(청)나라의 運勢(운세)가 아주 絶頂(절정)에 다달은 모습이고 그 지나선 가경제,로 부터 쇠퇴 일로를 걷게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가경제 [嘉慶帝]銜字(함자)를 본다면 天澤履(천택이)괘 上爻(상효) 象辭(상사)에 말씀이 맞는 것이 어른께서 위에 계시니 잇는 代(대)를 큰[帝王(제왕)의 자리] 가경제,로 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所以(소이) 그 홍력이 운세가 지나고 난 다음은 그 차츰 기울어진다는 의미를 이미 내포하고 있음인 것이다
四柱(사주)本命(본명)物象(물상)은 그 伐柯伐柯卽遠(벌가벌가즉원)不多本費(불다본비)手脚(수각)更無(갱무)風波(풍파) 로다 하고 있다 = 權力(권력)의 자루를 베고 벤지가 이미 오래 遙遠(요원) 하여 졌는지라 所以(소이) 皇太極(황태극)이 나라를 세운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지라 本然(본연)에 권력을 행세하는 힘의 낭비가 많치 않아 졌는지라 팔다리가 거듭 풍파가 있을 수가 없구나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소이 사방 四肢(사지)手足(수족)에 해당하는곳이 말썽이 없다는 의미 태평세월을 謳歌(구가) 한다는 말이리라 그만큼 세상이 그 繁榮(번영)을 謳歌(구가)하고 그 騷擾(소요)가 적은 시절 이었다는 것이리라 그 아주 풍요로운세상을 말하는 것이라 할 것인데
伐字(벌자)는 그 깃발과 武器(무기) 槍(창)을 같이 합성 해서 논 글자 인데 앞에 人邊(인변)은 깃발 세워 논 모습임 그것이 바람에 나브끼는 모습 임, 그 君王(군왕)등 힘 가진 것을 상징하는 글자가 된다 所以(소이) 敵(적)을 쳐선 그 功勞(공로)를 과시하는 글자인 것이라 그래선 칠 伐字(벌자)며 자랑할 伐字(벌자)가 되는 것이고 四柱(사주) 天干(천간)에 火氣(화기)와 金氣(금기)가 混成(혼성)해서 들은 것을 가리키는데 앞의 깃발 形(형) 丁(정)은 丙丁(병정)을 말하는 것이고 戈(과)는 庚辛(경신)을 말하는 것인데 이렇게 左右(좌우) 臣下(신하)가 丙丁(병정)庚辛(경신) 混成(혼성)해서 明堂(명당)에 羅列(나열)시키고 그 중간 戊己(무기) 帝王(제왕)이 되어선 君臨(군림)한다는 그런 말인데 伐字(벌자)[사시 뺏침 자루 하나를 베어 버리듯 떼어버림 中央(중앙)이라 하는 戊字(무자)가 되는 것이다
金氣(금기)에다간 戊字(무자)를 갖다가선 붙치면 권력을 상징하는 도끼 鉞字(월자)가 된다 그런 도끼자루를 잡은 자가 곧 군왕이던가 제왕이던가 하다는 의미이리라 柯字(가자)는 그 도끼 자루를 의미하는 글자인 것이다 左右(좌우)輔弼(보필) 四正方(사정방)에 보필자를 둔 임금님이라 하는 내용이리라 丙丁(병정)戊己庚辛(무기경신) 있음 所以(소이)丙丁(병정)庚辛(경신)이 戊己(무기)를 중간 拱挾(공협) 싸고 돌으면 자연 병정경신 外廓(외곽) 甲乙(갑을)壬癸(임계)는 말 안해도 절로 있을 것 아니냐 이다 다 그 만큼 많은 手下(수하)를 거느린 천하를 둔 해탈 옷 껍질 象(상)에 該當(해당)하는 四柱(사주)構造(구조)명조 이라는 것인데 마치 무기 임금님은 보이질 않고선 昆龍袍(곤룡포)만 보이는 것 같다할 것이다 곤룡포 있는 속 에 임금님 게시지 않겠느냐 이다 다 아- 곤룡포가 임금님이 입는 옷인데 누가 걸치 겠느냐 이다 다
丙 庚 丁 辛
子 午 酉 卯
이제 만주족이 건륭때에 와서 그꽃을 흐드러지게 피워 보인 모습이다 이름은 弘曆[홍력] 성씨는 노아합적[누르하찌 =노라지]의 자손으로서 愛(애)新(신)覺(각)羅(라)라 한다
사정방의 자오묘유를 깔고 병정 남방의 도화 꽃을 그 경신금의 관으로 삼았다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멋잇는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라할 것이다 ,그의 방대한 업적은 다말할수 없고 그 로맨스가 아주 많은 그런 임금으로서 한 시대를 잘 장식한 풍류를 아는 임금이라 할 것이다
건륭제 (乾隆帝 ; 1711.9.25~1799.2.7])
중국 청나라 제6대 황제(재위 1735∼95)이다. 이름은 홍력(弘曆)이며 시호는 순황제(純皇帝)이고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옹정제(雍正帝)의 넷째 아들로, 모후는 유호록(?祜祿: 弘毅公額亦都의 曾孫女)이고 황후는 부찰(富察: 察哈爾總管李榮保의 딸)이며 아들 17명, 딸 10명을 두었다. 옹정제가 제정한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에 따라 1735년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하였는데 이것은 옹정제의 아들 중 만주족을 어머니로 한 아들은 건륭제 뿐이었기 때문이다. 조부 강희제(康熙帝)의 재위기간(61년)을 넘는 것을 꺼려 재위 60년에 퇴위하고 태상황제가 되었는데, 이 태상황제의 3년을 합하면 중국 역대황제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
조부 때부터의 재정적 축적을 계승하여 안정되고 문화적으로도 난숙한 ‘강희 ·건륭 시대’라는 청나라 최성기를 이룩하였다. 초기에는 민중을 계도하고, 만인(滿人) ·한인(漢人) 간의 반목을 막고, 붕당의 싸움과 황족의 결당을 금하는 등 내치에 전념하였으며, 만년에는 중가르 평정 2회(1754 ·1757), 위구르 평정(1759), 대금천(大金川) 평정(1749), 대 ·소금천(大小金川) 평정(1776), 타이완(1788) ·미얀마(1778) ·베트남(1789) ·네팔(1790 ·1792) 등의 원정과 평정 등 10회에 걸친 무공을 세워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불렀다. 또 조부 강희제를 본떠 남순(南巡) 6회, 동순(東巡) 5회, 서순(西巡) 4회의 내지 순회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외정(外征)과 내순(內巡), 천수연(千戒宴) 등의 사치로 막대한 경비를 낭비하여 만년에는 쇠운을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도 그가 총애하던 화신(和筌)의 전횡과 관리의 독직(瀆職), 만주인 ·무관들의 타락 등이 1796년 백련교(白蓮敎)의 난 때 표면화되었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자 1795년 가경제(嘉慶帝)에게 양위했다.
문화적으로는 그의 개인적 자질이 풍부하여 절정에 달했으며, 예수교 전도사들을 통해 서양의 학문 ·기술이 전래되고, 중국이 유럽에 소개되는 등 국제적 교통이 열렸다. 예수회선교사들은 그를 태양왕 루이 14세와 비교하였다. 한편 고증학의 번영을 배경으로 《사고전서(四庫全書)》가 편집되고 《명사(明史)》가 완성되는 등 수사사업(修史事業)도 활발하였다. 그리고 티베트의 다라이 라마의 권력기관으로 ‘가샤(티베트 지방정부)’ 조직을 정하고 구루카족이 침략하자 군대를 파견, 이들을 물리쳤다
한편, 그는 아름다운 물건에 대한 취미가 선임 황제들보다 각별하여 자금성의 남쪽에 있는 구월관 안에 만든 작업장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곤 했다. 또한 그는 강희제처럼 예수회의 신부들의 예술적인 재능과 과학적 지식만은 아낌없이 받아들였다. 이들 서양의 '조언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견륭제로부터 회화와 건축술의 재능을 높이 인정받았던 이탈리아 선교사 주세페카스틸리오네였다. 건륭제는 1747년부터 1759년까지 완벽함과 밝음을 뜻하는 여름 궁전인 원명원의 동북쪽에 서양식 궁정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그 설계도를 이 밀라노인과 수학자이자 수리학에 정통한 천문학자인 프랑스인 미셀브누아, 두 사람에게 맡겼다.
건륭제의 긴 통치기간 중에 자금성 안에서 보수와 재건이 그의 취행에 따라 끊임없이 이루어졌지만, 특별히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장소가 한군데 있다. 영수궁이 그곳이다. 건륭제는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에서, 61년간 통치를 했던 할아버지보다 더 오래 권력을 유지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60년간의 통치기간이 끝나면 영수궁에 칩거하겠다는 뜻을 오래 전부터 밝혀왔다. 그에 따라 영수궁은 1772년에서 1776년 사이에 그의 취향에 맞게 성대하게 보수되었다.
건륭제- 묘호와 시호: 고종순황제
이름: 홍력
재위기간:1736~1795
생몰연대:1711~1799
황후:효현순황후(부찰씨) 1712~1748년 사망
효의순황후(위가씨)1727~1775년 사망
가경제의 생모이며 원래는 황귀비였다
가경제 즉위후 황후로 올려졌다.
황후(오라나랍씨)1718~1766년사망
건륭제의 남순(건륭제는 황제의 딸에서처럼 자주 강남지역을 순방했는데
상당히 들었음)도중 황제의 비위를 거슬려 귀경조치 당한후 절망끝에 사
망했음
장례도 황귀비의 의식으로치루고 황후의 능을 만들지도 못하고 황제와 합
장도 아니한채 건륭제의 후구인 순혜황귀비의 능침에 같이묻혔다.
따라서 황후의 시호, 신패도 없으며 제사도 받지 못했다.
모후: 효성헌황후(뉴호록씨)1692~1777년 사망
원래는 옹정제의 후궁으로 희귀비로 불렸으나 건륭제즉위후 황태후가 되었음
청나라때 가장 장수한 황태후였음
자녀는 아들 17명 딸 10명인것이 정설임
하지만 원래 건륭제남순등으로 궁밖에서 지낸일이 많았으므로 황제의 딸같은 드라마가 있는거겠죠.
건륭제가 남순을 너무 많이하여 생긴 여담이 있거든요.
건륭제는 원래 옹정제의 친아들이 아니라 희귀비가 딸을 낳자 다른 집의 아들과 바꿨다는 얘기와
옹정제가 옹친와 시절 강희제와 같이간 사냥터에서 시골처녀를 겁간하여 생긴 아들인데 그 아이를 희귀비가 낳은 것으로 했다는 얘기가 있음
건륭제 다음황제는 가경제로 인종 예황제라고 함니다 건륭제의 15번째 아들이었음,
출처 : 청 건륭황제 명조 - cafe.daum.net/dur6f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