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安昌浩(안창호) 조인데 이범석 장군조와 類似(유사)한면이 있다
癸 癸 癸 戊
丑 亥 亥 寅
안창호,라는 銜字(함자) 物象(물상)은 老天不容(노천불용)에서 一木焉能支大廈(일목언능지대하)일가? 로 化(화)하여지는 모습인지라 金大建(김대건),이 物象(물상)과 마찬가지로 그 西鬼(서귀)믿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改化(개화)期(기)에 開化思想(개화사상)에 물이 들어선 西鬼(서귀)思想(사상)에 대단하게 물이 들은 자라 할 것이다 김대건,이 條(조)는 一木撑天(일목탱천)이라 하여선 하나의 나무가 하늘을 버팅기고 있는 모습인데 [ 唯一神(유일신)을 말하거나 그렇게 혼자만 독판 잘났다는 표현임] 여기서는 하나의 나무를 갖고선 큰집을 버팅기고 있는 모습지탱하고 있는 모습이라 하니 거의 類似點(유사점)이 있을 듯 하다
老天不容(노천불용)이라 하는 것은 개화사상에 물이 들어선 낡은 페단을 용납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구태의연한 당시 시대상을 개화하려 하였든 자라고 볼 것인데 '도산'이라 하는 物象(물상)역시 같은 의미이다
집이라 하는 것은 원래 네 기둥이 서서 있어야만 그 안전하게 짓게되는데 혼자 독판 잘 낫다고 그렇게 독불 장군 처럼 나댄다면 우에 큰 집을 지탱할 수 있겠느냐 이런 말도 된다 할 것임에 큰 집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 이요 宇宙(우주)時空(시공)이요 작은 것은 각 家庭(가정)이나 자기 一身(일신) 마음의 宿住(숙주)가 되어진 것을 말한다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 戊寅(무인)이 하나의 기둥이 되지 않겠는가 하여 보는 것이다 漢文(한문)으로는 亦是(역시) 老天不容(노천불용)이라 하여선 노련한 하늘 낡은 하늘이 용납을 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그 하늘에 죄를짓는 樣相(양상)이거나 그 破字(파자) 해석하여본다 하나의 작은 달에 견준다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봐야할 것이다 아무튼 오래된 하늘 나이 많은 늙어진 하늘이 용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좋을 것이 있겠느냐 이다 다
그러니깐 기존의 사상이나 제도 이런 것에 의한 慣習(관습)이런 것을 打倒(타도)하려든다면 그렇게 기존의 것은 모두가 나이많은 노련한 구태한 이념사상 에 의한 것으로서 그런 것을 신격화 한다면 늙은 하늘 낡은 하늘이 되는데 그런 것을 퇴치하겠다고 나댄다면 어떻게 오래된 생활 풍습 같은 것이 반가워할 리가 있겠느냐 이런 내용이고 갸들 주장하는 논리가 참으로 하늘에 대하여서는 위배되는 그러한 사상 이념 일수도 있는 것이라는 것이리라 이렇게 선입견 所以(소이) 西敎(서교)는 凶惡(흉악)한 것이다라고 깔아놓고 지금 이분의 팔자를 관찰하고 있다 아무리 개화나 독립에 대한 열의를 보이고 훌륭한 자라 할지라도 일단은 西鬼(서귀)를 믿는 것은 옳은 방식이 아닌 것이다 남의 歷史(역사)美化(미화)하는 것을 믿어선 자기나라 어쩌겠다는 건가 결국 지금 와서 본다면 남북이 갈라져 있질 않는가 이다
그 列强(열강)의 앞잡이가 되어 갖고는 그 세력을 끌어들여선 갈등 조성 이념전쟁 치루게 하여선 결국은 남북이 갈라져선 그 형제와 동포에 멍이 들게한 思想(사상)이 바로 西敎(서교) 사상이라 할 것인데 배불리 처먹는 인간들은 祝福(축복)을 받아선 좋다 할 것이만 그 반대하여 타도대상이 되어진 자들은 원수로 여기는 것이라 할 것이다 大義的(대의적)으로는 西敎(서교)는 그 침략 세력의 압잡이 首魁(수괴)鬼神(귀신)역할을 한것이라 할 것이다
말을 바꾼다면 악마나 마귀를 끌어 들인 것이라 할 것이다 하나님 두 번 돼었다간 우리나라가 열 동강이 났을 것이다
대정역상은 1654로서 風雷益卦(풍뢰익괘) 四爻(사효) 周(주)나라가 鎬京(호경)이 낡아 빠져선 더는 衰(쇠)하여 나라를 부흥할 역력이 없는지라 都邑(도읍)을 옮기는데 그 힘이 자체적으로 없음에 힘 있는 諸侯(제후)세력 鄭晋國(정진국)의 諸侯(제후)의 힘에 의지하여선 遷都(천도) 所以(소이) 洛邑(낙읍)으로 移動(이동)하는 모습인데 그렇게되면 좀 利(이)로울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데 无妄(무망)으로 돌아가니 역시 壓殺(압살)政局(정국)이라 諸侯(제후)등살에 그 힘을 天子(천자)가 못 쓰는 樣相(양상)을 그려주고 있다 봐야 할 것이다
六四(육사)는 中行(중행) 告公從(고공종)하리니 利用爲依(이용위의) 遷國(천국)이니라
象曰(상왈) 告公從(고공종) 以益志也(이익지야)라 = 육사는 中庸(중용)의 道理(도리)를 행하려는 모습이니 公(공)들이 고하는 대로 쫓게되면 의지하여선 사용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니 어느데 이로울 것인가 都邑(도읍)을 옮기는데 이로울 것이다
象(상)에 말하데 공들의 고하는 데로 쫓는다하는 것은 사용하게 된다면 이익을 가져온다는 뜻이다 또는 의미로서 有益(유익)하다는 말이리라
말하자면 戊寅(무인)대 所以(소이) 一木(일목)이라 하는 하늘성을 대표하는 것이 그 宗徒(종도)들 힘있는 세력의 등에 엎혀선 그 이동하는 모습 서쪽에서 동쪽으로 와서는 威勢(위세)를 떨치려는 모습인데 西京(서경) 鎬京(호경)에서 洛邑(낙읍)으로 東遷(동천)하여선 그 周(주)나라가 다시 한번 復興(부흥)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인데 그 西敎(서교)가 동점하여 들어온 것이나 類似(유사)한 사항을 말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所以(소이) 鬼神(귀신)이 그 힘있는 추종자 宗徒(종도)들의 등에 엎혀선 移動(이동)해오는 모습을 가리키는데 그런 이동해 오는 자중에 한사람이 되었다 所以(소이) 천자의 제후나 마찬가지인 사람중에 한 사람이되었다 여기서는 그렇게 해석 可能(가능)하다할 것이다
또는 그렇게 西敎(서교)를 끌어들이는데 앞장선 사람으로서 소이 당시 開化(개화)물 먹은 자들은 다 그렇게 開化(개화)한다는 빙자 宣敎(선교)事業(사업)빌미아래 남에 鬼神(귀신)崇尙(숭상)하고 전통을 갉아먹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래선 그 귀신 등 에 업은 것을 天子(천자)등에 업은 것으로 여겨 마치 諸侯(제후) 曹操(조조) 漢王(한왕) 등에 업은 것 처럼 처럼 힘을 쓰는 것처럼 그렇게 귀신 등에 업은 위세를 부렸다는 것이리라 지금도 그렇치 않는가 이다 그 귀신 등에 업은 세력들이 그렇게 위세를 떨치고 있지 않느냐이다
필자의 눈에는 西洋(서양)鬼神(귀신)이지 그 무슨 구세 나발인가 하는 그런 생각일 뿐 하나도 탐탁하게 여기질 않는다 아주 큰 무당 '샤만' 인간과 神(신)의 영역과 소통하는 자들로서 그 힘 약한 자들을 종으로 부려 처먹고 그 씨내림 터전으로 여기는 악질 귀신 세력인 것이라 하나도 빈가워 할 것이 없다할 것이다 일체 귀신 믿는 자들은 이래서 필자와 正反對(정반대)에 있는 打倒(타도)對相(대상)일 뿐이다
북방 물결이 넘실거리는데 쪽박이 파도를 타듯 그렇게 물결에 실려선 戊寅(무인) 표주박 같은 것이 떠 오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 암흑기에 黎明(여명)이 오라고 하는 모습으로도 보여진다고도 할 것이다
本命(본명)物象(물상)은 딱 한자 離(이)= 所以(소이) 太陽(태양=밝다)이라 한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 주석인가 태양이라 하고 그 그물 이별 덫 걸린다 곱다 이런 의미를 갖은 것이라 할 것이다
所以(소이) 鬼神(귀신)이 그렇게 唯一神(유일신)으로 태양이라 하는 의미이리라 또 북방 어두움에 反對(반대)象(상)은 자연 남방 밝은 것이 아니겠느냐 이다 다 그래서 그 離[이]라 하였을 것이다
* 당시 우리나라를 그 周(주)나라가 처한 시대 상황처럼 여겨선 그냥으로 서는 더는 도저히 그 지탱할 수 없는 처지 그만큼 儒家(유가)의 도리에 낡아선 피폐해진 세상을 새롭게 고쳐보려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그 周(주)나라가 鎬京(호경)에서 洛邑(낙읍)으로 東遷(동천)하려는 樣相(양상) 所以(소이) 저들이 말하는 가나안 福祉(복지)인가 나발인가로 우리나라를 이동해 노으려는 그런 상황에서 그 힘 쓰는 鄭晋國(정진국)의 諸侯(제후) 역할 같은 것을 하였다고 좋게 말을 하여 둘러될 수도 있다 하겠다
癸 癸 癸 戊
丑 亥 亥 寅
* 함자로는 갓머리여인이 물을 드넓게 창성 시킴을 알린다는 뜻으로서 갓머리여인은 戊字(무자) 여인 門戶(문호)가 년간 머리에 있다는 것이고 昌盛(창성) 시킨다는 의미는 寅字(인자)의 밝음 映寫機(영사기) 돌리는 것을 의미하고 그로 인하여선 癸亥(계해)丑(축) 北方(북방) 水氣(수기)가 만연하게 펼쳐지는 것을 말한다할 것이다
* 所以(소이) 戊字(무자)에 適合(적합)하는 戊(무)에 麾下(휘하)무리중에 한사람이라는 것인데 戊字(무자)를 제압하는 寅木(인목) 관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戊癸合火(무계합화)를 寅亥(인해)合木(합목)이 받들 처지인데 그 妬合(투합)의 작용을 일으키는지라 그래 못하겠다는 것이리라 그 조선말엽의 개화사상의 선구자로서 西勢(서세)를 접하는데 선구자 역할을 한 사람의 한 분이다
閔中殿(민중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는지 모르지만 당시 國母(국모)가 戊干(무간)이라 이래 받들 처지인데도 그 이념의 달리하여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여러 足跡(족적)을 남기지 않았나 하여본다 을사보호조약 이후로는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한 상태이라 1895년 乙未(을미)년에 민비가 시해되었는데 그로부터 십년후 을사 년에 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렇다면 명성황후와는 아무런 연계 관계가 지어지지 않고 그 戊字(무자)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할 것인데 소이 끝에 金局庫(금국고) 丑字(축자)가 있는 것을 보니 西勢東占(서세동점)의 胎動(태동)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할 것이다
* 원래 三癸(삼계)는 丑(축)中(중) 辛金(신금)으로부터 나오는 銳氣(예기)이다 ,所以(소이) 寅字(인자) 映寫機(영사기)가 타겟 丑(축)中(중)申(신)金(금)을 亥亥(해해)로 뻗쳐 비춤에 여기서 그 映像(영상)이 癸(계)로 화하여선 허공중이나 마찬가지인 天干(천간)에 떠선 보게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戊字(무자) 년간이 의도하는 적합으로서 일대 그 무대에서 연출하는 연기 그 청중을 끌어놓고 감동 시키는 그러한 작용 행위가 아닌가 한다 소이 나무에 앉은 꾀꼬리나 앵무새가 일대 그 적합한 옥선율 변론을 토함에 그 청중 관람객이 빠져드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
안창호 [安昌浩, 1878.11.9~1938.3.10]
요약
한말의 독립운동가·사상가.
호 도산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평남 강서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 안창호 선생동상 /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본문
호는 도산(島山)이다. 평안남도 강서(江西)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배우다가 서당 선배로부터 신식학문에 눈을 뜨고,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던 중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1895년 상경, 구세학당(救世學堂)에 들어가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쾌재정(快哉亭)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하였다. 훗날 종교가이며 교육자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승훈(李昇薰)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고,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韓人共同協會)를 만들어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 1907년 이갑(李甲)·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헌병대에서 3개월간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1909년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그 후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1912년 그 곳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조직하여 초대 총회장에 취임하고,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부분열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하였다.
1926년 다시 상하이로 가서 흩어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상촌(理想村) 건설에 뜻을 두고 이를 추진하였으나 일제가 중국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실패하고,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同友會)사건으로 재투옥되고, 19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사망하였다.
그의 기본사상은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자주독립을 이룩하려면 넓은 의미의 교육, 즉 국민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흥사단 정신은 오늘날에도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리웨이에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가 생겼다.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 '안창호 우체국'이 생겼다.
출처 : 개화사상 도산 안창호 명조 - cafe.daum.net/dur6f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