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택의 개요 및 원리

한국 풍수의 역사

햇님달님 | 2017-09-30 07:16:12

조회수 : 1,604

 
한국의 자생 풍수와
북한의 고려유적
강사 : 최 창 조
강의 1
한국 풍수의 역사
강사 : 한 동 환
 

 
풍수 역사 강의 제 1 주제
 
    똑똑한 임금들이 풍수에 빠진 이유
 
    「묘청의 난과 풍수」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으로 의미를 부여한 묘청의 난이
   풍수에 의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고려 인종은 인주 이씨와 경주 김씨 등 소수
   권문세족에 의해 좌우되는 권력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왕이었다. 특히 인주
   (仁州) 이씨 권력의 핵심이었던 이자겸의 난으로 왕권강화에 대한 인종의 염원은 강
   렬했다. 이때 인종의 정치적 고문 역할을 하던 묘청은 인종5년(1127년)에 개경의 지
   기가 쇠잔해졌음을 지적하고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한다. 묘청은 서경 부
   근에 있는 임원역 일대가 대화세의 길지로 여기서 왕이 통치를 하면 주변 국가들을
   능히 제압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여기서 대화세란 큰 꽃봉오리 모양의 지세를
   이야기한다.
 
   보통 풍수에서는 명당을 꽃에 비유하기 때문에 땅기운이 강하고 넓은 명당 터를 대
   화세로 표현한 것 같다. 나라에 새로운 기풍을 염원하던 인종은 묘청의 주장을 받아
   들여 서경 임원역에 대화궁을 짓고 일년 후에 궁궐의 완성을 보게 된다.
   이로부터 8년 동안 묘청은 자신의 사상을 인종에게 주입하며 개혁적 정책을 펴게된다.
   인종5년에 인종은 15개조의 개혁령을 발표했는데 이는 주로 왕권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시인으로 유명한 정지상 등과 연결된 묘청은 금나라에 대한 공격 등 주로 적극적인
   북진정책을 통한 고토회복에 진력하게 되고 중국중심의 사대주의적 세계관을 거부한다.
   인종은 개경을 자주 비우고 묘청과 함께 서경의 대화궁에 머무는 횟수가 늘어났다.
   이에 개경을 중심으로 한 기존 귀족문벌세력들의 개혁에 대한 반발이 거세어 지게 된다.
   결국 묘청은 김부식에 의해 진압당하고 문벌세력들의 전횡은 더욱 강화되고 말았다.
   역사는 승리자만을 기억한다. 그래서 패배자인 묘청은 풍수라는 미신으로 왕을 현혹한
   요망한 승려로 역사에 기록되게 되었다. 단재선생이 비로소 묘청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단재는 묘청의 난을 화랑사상과 불교사상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와 한학
   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
   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묘청이 화랑사상과 불교사상, 국풍파, 독립당, 진취사상의 상
   징적 대표였던 셈이다. 천개라는 연호를 쓰고 황제를 칭한 것은 조선문명을 중국에
   대응하는 대안으로써 확립시키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역사나 문화를 모두 중국중
   심에서만 보려는 사대주의를 배격하고 독자노선을 추구했던 묘청의 뜻은 재평가함이
   당연한 것이다. 묘청의 풍수지리는 중국에서 수입된 풍수가 아니라 산천을 답사하며
   심신수련을 했던 화랑사상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국풍은 최치원이 우리나라에
   있었던 고유한 사상이라고 했던 풍류도와 상통하는 개념이다. 바람의 흐름을 아는 것
   그것은 곧 지기의 흐름을 아는 것이다. 지기를 아는 것은 땅의 이치를 아는 것이요 그
   것은 곧 당대의 최첨단 과학이었던 것이다.
 
   「또 한사람의 요망한 중 신돈」
   묘청의 난이 있은 지 200여 년 후 다시금 귀족문벌세력의 부패한 아성에 도전한 다윗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신돈이다. 묘청과 신돈은 둘 다 승려라는 공통점 외에도 비슷한
   점이 많다. 왕의 일급 참모로써 왕과 함께 문벌귀족을 견제하는 개혁을 폈다는 것과
   풍수의 논리를 빌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려 했다는 것이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고려말 조선이 건국하기 불과 40여 년 전에 공민왕이 마지막 개혁의 불꽃을 지폈다.
   당시 문벌귀족들은 광대한 땅과 수많은 노비를 소유한 채 외세였던 원나라 세력과 결탁
   하여 나라의 부를 도적질하였다. 공민왕은 외세인 원나라를 배격하는 반원정책과 아
   울러 문벌귀족을 억압하였다. 이때 신돈이 등장한다. 공민왕은 신돈을 국사(國師)로
   임명했다.
 
   문벌세력을 혁파하기 위해서는 이들과는 신분이 다른 승려를 등용하는 것이 합리적이
   었다. 신돈은 곧바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력층이 도적질한 토지를 원 소유주
   에게 돌려주고 노비는 해방시켜 원래의 지위인 일반 백성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러나 백성들로부터 성인이라고 까지 칭송되던 신돈의 운명 또한 묘청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수 백 년 쌓아올린 문벌귀족들의 힘 앞에 신돈과 공민왕 모두는 목숨을
   잃고 좌절하였다. 공민왕과 신돈의 실패는 불과 20년 후 이성계의 성공으로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돈 역시 역사의 패배자가 되었기 때문에 수많은 인신공격을 당해야
   했고 요즘에 와서야 요망한 중놈에서 개혁적 민본적 정치가로 재평가되고 있다.
 
   「임금과 풍수」
   고려시대에는 인종과 묘청, 공민왕과 신돈의 커플이외에도 임금이 개입된 풍수논의가
   많았다. 태조왕건은 “짐은 삼한 산천의 음덕에 힘입어 대업을 이룩하였다.”라고 할만큼
   풍수에 몰두해 있었고 제3대 임금 정종은 평양의 지기에 주목하여 서경으로 천도하고
   자 하였다. 개성만큼이나 평양은 고려시대의 명당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개성의 지
   기가 쇠했다고 하는 여론이 있으면 왕들은 서경인 평양에 가고싶어 했다.
   묘청의 대화궁뿐만 아니라 제11대 문종대(1046-1083)은 평양에 “좌우궁”을 지어 한 번
   씩 들리고 또한 지금의 서울에 남경을 설치하였으며 15대 숙종대(1095-1105)에는 김위
   제가 도선의 저작이라고 알려진 “도선기”, “도선답산가“, ”삼각산명당기”, “신지비사“
   등의 풍수서를 근거로 남경에 왕이 머물러야 나라가 발전한다고 주장하였고 숙종이 이
   를 받아들여 현재의 경복궁 부근에 궁궐을 설치하고 머물기도 했다. 제16대 예종은
   평양에 용언궁을 지어 수시로 드나들었으며 풍수도참서를 집대성하여 ”해동비록“이
   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태조 왕건에서 제32대 우왕(1374-1388)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고려의 왕들은 개성에
   만 머물러있지 않고 좋은 지기를 골고루 받기 위하여 평양과 한양을 나들었다. 특히
   개혁적이고 영민한 임금들일수록 더 했다. 예종의 경우에는 윤관을 내세워 여진을 정벌
   한 왕이었으며, 문종이나 숙종 모두 학문을 발전시키고 고려의 문화를 절정에 올려놓은
   임금들이다. 이들은 왜 풍수에 그토록 매력을 느꼈을까. 이것은 누구도 자신있게 대
   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도읍지에 대한 논의와 권력의 교체」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방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새로운 왕이 들어서면
   반드시 새로운 분위기나 기풍을 세우고 싶어한다. 요즈음에도 새로운 권력자가 나타
   나면 그 전 권력자와 차별되는 새로운 시책을 펴서 자신이 새로운 권력자임을 대중
   들에게 각인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권위를 창출하려고 애쓴다.
   요즘과 같이 다양한 홍보수단을 갖지 못했던 옛날 왕조시대에 있어서는 수도를 옮겨
   권력의 물리적 환경을 바꾸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새 권력이 등장했음을 알리는 방법
   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지리적인 지식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풍수의 도참사상은 나라를 강하게 하는 땅을 찾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권력의 정점에 있는 왕이라면 이러한 내용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땅이 나라에 힘을 준다는 논리가 나름대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늘과 땅과 사람의 조화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천지인합일사상이 당시 우리민족의
   정신세계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단군신화와도 일치하는 논리이다. 하늘
   에서 내려온 환인과 땅의 곰 그리고 태백산과 아사달이라는 장소와 단군이라는 사람이
   결합되어 새 세상이 열리는 구조의 단군신화는 가장 바람직한 새로운 권력질서를 열기 
   위한 조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어디에 도읍을 잡는가 하는 문제는
   단지 궁궐을 짓기 위한 터를 잡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바로 천지인(天地人)의
   조화를 이뤄 이를 바탕으로 하늘과 사람, 땅으로부터 권력의 합법성, 정통성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가 내재된 것이 도읍지를 정하는 문제였다.
 
   하늘과 땅의 지지를 얻는 것은 본질적이긴 하지만 상징적 명분이었고 보다 현실적인
   목적은 피지배자들로부터 권력에 대한 승인을 받아내는 것이다. 민중들의 염원과 일
   치되는 곳이 또한 하늘의 뜻과 땅의 의도하는 바를 잘 반영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당시 민중들의 땅에 대한 사상을 좌우하던 논리가 풍수였으므로 풍수사상에서 새로운
   도읍지에 대한 주장이 나온다는 것은 새로운 권력질서를 기다리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것은 혁명과 연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기존의 권력자들은 미리 손을 써서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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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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