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택의 개요 및 원리

권력과 풍수

햇님달님 | 2017-09-30 07:14:54

조회수 : 1,321

 
「권력과 부의 세습을 정당화 시켜라」
 
    과연 그럴까. 아니다. 결코 우리가 미신적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음택풍수에
    빠진 사람들은 결코 우리민족 전체가 아니다.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문제는 그 일부가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는 우리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조선중기까지 음택풍수에 대한 수요는 국왕의 왕릉 터를 잡는데 한정되어 있었다. 고려시대가
    불교국가였으므로 매장보다는 화장의 풍습이 강했기 때문에 민중들이 장례에 풍수를 논할 여지
    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교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조상숭배와 그에 따른
    혈연중심의 사고방식이 점차 지배층을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음택풍수에 대한 수요가 늘기 시작
    했다. 권력을 가진 자들부터 자신들의 조상의 묘를 소위 명당에 쓰고 싶어했다. 그리고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후손이 잘된다는 식의 논리를 유포시켰다. 실제로 풍수의 발생지인 중국에서조
    차 시신을 좋은 땅에 묻으려고 하는 기록은 후한서 원안전에 처음 나온다. 그전까지는 묘지와
    길흉은 별 상관이 없었다.
 
    한서 예문지에 “궁택지형(宮宅地形)”이라는 궁궐과 집의 땅모양을 논한 풍수서가 보이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양택풍수를 다룬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음택풍수는 적어도 후한시대
    이후부터 유교이념이 교조화 되고 조상숭배가 중시되면서부터 갑자기 전면에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전통은 1470년 화장(火葬)에 대한 전면 금지령이 내린 조선중기부
    터 시작되었다. 특히 지배층으로부터 말이다. 지배층이 풍수에 적극적이었음은 세종실록에 세
    종이 권도라는 사람을 나무라는데서 잘 나타난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권근의 아들인 권도는 음
    택풍수설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세종때에 주산을 어디로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중에 권
    도는 풍수설은 논할 가치가 없다고 이야기 하게된다. 이에 발끈 화가 난 세종은 권도에게 자신
    의 아버지는 풍수에 의해 좋은 곳에 무덤을 만들어 놓고서도 풍수를 비판한 권도의 철저히 기회
    주의적이고 이중적인 행동을 비판하게 된다. 왜 권도는 풍수가 이치가 없다고 임금 앞에서 주장
    했으면서도 그의 아버지 권근을 명당이라는 곳을 찾아서 장사를 치렀을까. 이것이 음택풍수의
    그 질긴 생명력의 비밀을 푸는 단서가 된다.
 
    나는 조선시대에 권도와 같은 권력층이 음택풍수가 이치가 있는 것이라고 믿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한편으론 음택풍수의 논리를 수용하여 명당에 묏자리를 잡기 위해 가장 혈안
    이 되어 설쳤던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음택풍수에 대해 철저히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성종실록에 성종이 궁궐주변의 권문세족들의 집들이 지맥을 눌러 궁궐의 땅기운이
    나빠진다고 하며 철거를 명령하자 신하들이 이에 반발하며 벌떼처럼 일어섰다. 허무맹랑한 풍
    수설을 믿고 대신들의 저택을 철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음택풍수는 요망한 것이라고까지
    이들은 이야기했다. 그러나 성종은 한양의 건설할 때 이미 풍수설을 이용했기 때문에 지금에 와
    서 풍수설을 무시할 수 없다고 신하들을 반박하고 권신들의 집을 철거하게 된다. 성종과의 논란
    과정에서 권신들은 풍수설을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라고 혹평했다. 권도와 성종 때의 사례를
    통해서 볼 때 조선시대 대다수의 사대부들이 음택풍수에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권문세
    족들의 음택을 보면 모두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두 당대의 내노라하는 지관을 데려다가
    묘를 썼다. 이러한 권문세족들의 풍수에 대한 이중적 태도에 대해 세종은 이렇게 비꼬았다.
 
    “(세종이) 승정원에 명하여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것이 집을 위하는 것만 못한가 보다.
    요새 사대부들이 집에 있으면 귀신이나 지리에 관한 일들은 하지 않는 것이 없으면서, 조정에
    나오면 모두 고상한 이론만 가지고 배척한다.” (세종실록 세종 15년 윤8월 25일조)
    그런데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조선시대 때만의 일이 아니다. 지금도 비록 일부이긴 해도
    정치인, 경제인, 대학교수, 언론인 할 것 없이 음택풍수를 부정하는 자신들의 소신과는 상반되
    게 집안에 누군가 죽으면 유명한 지관을 찾고 명당을 고르고 심지어 좋은 자리로 이장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니 지관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내가 어느 어느 유명한 가
    문의 터를 봐줬다고 자랑하게 되고 지배세력들의 은밀한 명당에 묏자리 잡기가 세상에 알려지
    게 된다.
 
    이리되니 아무리 공식적으로 “음택풍수는 이치가 없는 것이다” 또는 “나는 음택풍수를
    나라를 망칠 암적 존재라고 생각한다”라는 말이 발표되어도 이를 보는 보통사람들은 혼란에 빠
    지게 된다. 왜 아니라고 하면서도 학덕이 높은 사람, 돈 있고 권력있는 사람은 유명한 점쟁이를
    찾고 유명한 풍수를 찾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식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좀 멍청하고 맹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공식발표 보다는 비공식적으로 떠돌아다니는
    유언비어가 나중에 진실이 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오히려 공식발표가 더 불
    신된다. 그러니 눈치 빠른 보통사람들은 저렇게 높은 양반들이 무덤자리를 가리는 것을 보니까
    틀림없이 음택풍수에는 무시하지 못할 그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도 좋은 땅에 조상을 모시고 싶어한다. 잘되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공통된 소망
    이다. 그런데 지관에게 주는 수수료, 묏자리의 땅값이 도무지 평범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다. 수천 만원에서 수억이 드는 명당자리가 그저 꿈일 수밖에 없다. 남는 것은 허탈함과 절망감
    이다.
 
 
 

출처 : 풍수학 - blog.naver.com/ksks5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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