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과정은 있지만 결론은 없는 것이다.
과정속에 살아가는 것이 상생이라면 결론으로 살아가는 것이 상극이다.
상생은 과정에 있다보니 결론에 언제 이르는지 모르게 가는 것이다.
상극은 결론에 있다보니 과정을 참고 인내하며 견디어 내는 것이다.
둘다 똑같은 말이다. 그러나 출발이 다르니 과정도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사는 서로 상생을 하며 살아가고 또한 상생을 만들어 가기도 하고,
인간사는 서로 상극을 하며 살아가고 또한 상극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정답은 없다.
진리도 없는 것이다.
다만 살아가는 방식과 애환을 말하고자 함이다.
갑목이 병화를 상생하는 것이다.
갑목이 정화를 생하는 것이다.
갑목이 병화를 상생하는 것은 시간에 연속석상에 있는 것이라 멈추어 좌절을 해보지 않았다.
작은 비바람과 폭풍우에도 견디어 내지 못하니 이는 온실속에 화초로 자람을 탓해야 할 것이다.
을목이 병화를 생하는 것이다.
을목이 정화를 불생하는 것이니 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화를 나로 하고 목을 인성으로 한다면 재미있는 말들이 속출할 것이다.
갑목은 병화를 생하고 병화는 갑목의 생을 받으니 식상을 생하려 할 것이다.
갑목 병화의 상생은 상대의 부족함을 충족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니 세상사와 함께하는 것이다.
상대의 부족함을 충족하려니 더불어 나의 부족함이 충족되고 상호 상부상조 사는 지혜를 준다.
갑목 정화의 생은 나의 부족함을 충족하려 하니 상대의 부족함은 모르는 것이다.
나의 부족함에 겸양과 겸손의 미덕이 모두에게 귀감이 되니 그는 늘 부족하고 모두는 족할 것이다.
이것이 세월이 쌓이면 어느새 그는 저만치 올라갔고 모두는 저만치 올라간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을목이 병화를 생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부족하니 확인받고자 할 것이다.
모두에게 자신의 믿음과 확신을 검증받고 인정받고자 하니 처음은 유력하나 나중에는 부족할 것이다.
헛점과 빈틈이 없고자 하나 모두가 부족함을 알게되고 세월이 쌓이면 흉허물이 들어날까 염러스럽다.
을목이 정화를 불생하는 것은 불생하니 생하는 것이다. 상대의 부족함을 알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상대의 부족함에 함께하는 것을 당연시하지 못하니 자신의 부족함도 모르는 것이고 도토리 키재기다.
함께하는 지혜가 부족하니 타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니 이도 생하는 것이다.
생이면 생이고 불생이면 불생이지 이것이 무슨 말장난이냐고 묻는다면 이것이 상생으로 살아가기다.
사람은 결국 세월속에 살아가니 생이라는 것은 세월을 말하는 것이다. 불생이라는 것도 사는 것이다.
그러니 생하는 것이고 세월속에 살지 않는다하여 불생이라고 함부로 단정하지는 말자라는 말이다.
우리가 눈으로 익힌 상생과 불생이 인간사 살아가는 것에 대입하면 상생의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생은 세월이 들어가 있으니 과정에 사는 것이고 상극은 멈추어 꼿꼿이 섯으니 결론에 사는 것이다.
출처 : 상생으로 살아가기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