術士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운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정신세계를 알고자 했으니 외로운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외로움을 자처했으면 그 외로움 마져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術士이다.
술사가 하는 일이 사람의 길흉화복으로 분수를 일깨워주며 운명이라는 틀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인생의 행복할 권리나 만족하고 살 권리를 찾아 주는 것이다.
모르고 살면 편안한 것을 알고자 했으니 어찌보면 무모하고 어찌보면 잔인하다.
미시적으로는 운명을 디자인하는 것처럼 보이나 거시적으로는 불변의 법칙에 도전이다.
사람은 다치거나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고 약을 먹어 몸을 가볍게 한다.
사람은 마음이 다치면 대부분 술사에 의지하여 포기할 것은 포기하며 살아간다.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에 기대를 하고 희망하지 말아야 할 희망에 애착을 가진다.
마음에 골이 깊은 응어리는 편중된 오행이나 육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고,
마음에 애절하고 한스러움은 쇠약한 오행이나 육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때론 모질고 잔인한 소리도 해야 하고 때론 행복하고 만족할 권리를 찾아주어야 한다.
같은 값이면 좋은 소리 하고 싶지 나쁜 말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술사도 사람인 것이다.
희노애락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고자 하고는 자기 필요에 따라 선택하려고 한다.
인간의 얄팍한 지혜인지 살아남고자 하는 안간힘인지 무모하고 부질없는 애증이다.
희노애락이 이런것이다라고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생화극제로 간단히
표현하면 희는 制에 있고 노는 剋에 있고 애는 化에 있고 락은 生에 있는 것이다.
시시때때 희노애락은 변화되이 살아가는데 결국 術士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때를 아는 것이 고작이라 여긴다면 건방진 것인지 이런 질서도 부정하고자 악을 쓴다.
학문에서 지혜가 나오고 다시 지혜에서 학문이 정립되며 발전되는 것이 술사이다.
불가능에 도전하고 불가항력에 도전했으니 편인은 정말 위대한 선구자 인듯도 하다.
학문이 몸에 배이게 하는 것이 生化라고 한다면 타인를 제압하고 이기려는 것이 剋制이다.
剋制는 신왕자가 살아가는 방법론이고 生化는 신약자가 살아가는 방법론일 것이다.
만약 신약자가 剋制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몸이 상하든지 오버하고 사고를 쳐야 하고,
신왕자가 生化로 살고자 하면 정신병자가 되든지 괴이한 잡기에 빠져 살아야 할것이다.
生化는 오랜시간을 쌓고 또 쌓여진 것인데 剋制하는 일에는 속수무책이니 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약인 것은 아는데 시간으로 보상해야 하는 유지비와 이자는 눈덩이 같이 커진다.
운명이라는 얄굳은 장난에 속는 것이 결국 사람이라면 결국 속아주는 것도 生化일 것이다.
剋은 자멸하는 것이고 制는 탈을 쓰는 것인데 어떤 선택이 옳은지는 시간이 화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