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격은
용신으로서 귀결되니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의지라 볼 수 있다.
용신이 부실하면 나를 지킬수 없는 것이니 허물어 져야 하고,
나를 지키지 못하고 다치고 깨져야 하는 인연을 만들어 가야 한다.
안타깝지만 그러하다. 지켜야 하나 허물어져야 하는 아픔을 겪고
살아야 하니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사는 것과 같다.
흉격은
격 스스로 용신을 자처하는 것이니 타육신은 그져 용으로의 쓰임만
있을 뿐, 용신은 그져 필요에 따라 경우에 따라 활용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격 스스로 용신으로 귀결된다는 의미는
타인을 허물어 트리고 주변을 잘못되게 해야 내가 사는 것이다.
흉격이 착하게 살면 못쓰는 법이다.
흉격은 용감무쌍 주변을 잘못되게 하고 허무러 트려야 한다.
타인의 아픔이 곧 나의 기쁨이니 이것이 음양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흉격은 아무리 그일이 옳은 일이라 해도 사회적인 범주에서 보면 잘못하고 사는 것이다.
잘하고도 욕을 먹고 못하고도 욕먹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무엇이 정당하고 무엇이 그르다는 말인가. 승자는 명분을 얻고
패자는 그져 패자로서의 죄가만 받으면 되는 것이다.
월과 격을 착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월은 부모의 인연속에 태어난 나를 말하고 사회속에 성장하는 나의 말한다.
격은 사회속에 나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살아가는 나의 기틀을 말한다.
용신과 용의 쓰임은 다른 것이다.
용신은 혼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는 과거 현재 미래를 동일시하게
활용되어야 하는 것이니 이념과 신념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정신자세이다.
그러니 살아가는 이유에서의 총체적인 이유가 되는 것이 용신이다.
그러나 용은 상황에 따라 변화되고 따라가는 임시방책과도 같으니
용은 임기응변책에 불과한 활용적 가치에 준한다.
용을 용신처럼 활용하는 것은 무모하고 부질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처없이 떠도는 사람에게 당신이 떠돌아야 하는 당위성은
용신이라고 한다면 상황에 맞게 활용되는 것은 용일 것이다.
用과 用神이 다름이고,
月과 格이 다름이다,
스스로 정한 체용이 없으면 체용에 구분이 없이
싸잡아 말하는 것과 같은 남과 여가 모두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년초가 되어선지 분주한 일정에 궁리할 시간이 여유롭지 않다.
양건록과 음건록이 다름인데,
하물며 양인과 음일간 겁재가 다름은 하늘과 땅차이다.
음일간 겁재월 출생자가 관을 쓰는 용도와,
음 건록에 관을 쓰는 용도는 출발점이 다르다.
정관을 쓰고 편관을 쓰는 용도는 말할 것도 없다.
이미 월이라는 출발점은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이를 어떠한 관점으로 보는지에 따라 관을 활용하고 살을 활용하는 문제가 귀결된다.
사주를 간명하는 관점이 쉽게 접근한다면 모래성을 쌓는것과 같을 것이다.
주체와 객체 음양은 이순간에도 변화를 한다.
변화하는 음양을 오행과 육신으로 간명한다는 자체가 이미 무모한 접근이다.
...결국 래정은 점으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