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하다보면 통변이 쉽지 않습니다.
팔자를 보면 한눈에 보여지는 팔자도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고민입니다.
일반적으로 래정한 목적을 찾아 그에 상응하는 상담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차분히 오신 이유부터 시작해서 조목조목 시작해야 할지,
아니면 뜬금없이 중간부터 툭 치고 들어가야 할지,
상담자가 말하는 것이나 손님이 알고자 하는 것이나
결국 따져 보면 그말이 그말인데도 말하고 듣고 하는 차이점은 늘 있게 마련입니다.
필요한 말만 듣고자 하는 손님과
꼭 필요한 말만 하고자 하는 상담자는
음양이 합일되려면 서로의 믿음과 신뢰가 필요합니다.
이런 믿음과 신뢰가 필요하기에 합이라는 말을 합니다.
옛날 선배님들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손님과 월일이 합되면 상담이 술술 풀린다고...
이말은 생각해 보건데 합이라는 것은 서로 마땅하지는 않지만
손님과 상담자가 서로 맞추어 가려고 애�다는 의미로 보여집니다.
결국 손님은 필요에 의해 오시고 답답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시게 됩니다.
결국 상담자는 좀더 많은 부분 생각하고 상담에 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님과 상담자는
상담자의 리드에 이끌리게 되는게 대부분입니다.
뭣 모르는 상담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님의 관의 입장에서
통변하는 경우도 있고 인성의 입장에서 통변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상관견관된 손님들을 만나 된통 당하고 스스로 상처를 입게 됩니다.
또는 재극인 되어 있는 손님을 만나 팔자에 대한 확신이 깨져 내상을 입게 됩니다.
조금 안다 하여 상담자가 손님의 비견의 입장에서 상담을 하다가
손님에게 처음에는 좋다가 나중에는 서운하게 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식상의 입장이 되어 달콤한 방향성만 제시하고는 나는 모른다는 것보다는
났지만 하여간 상담에서 통변하는 것은 여간 어렵고 조심스럽지 않습니다.
결국 손님과 상담자는 결국 상극적인 만남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담자가 않그런다 하지만 손님은 이미 상극받을 준비를 하고 옵니다.
상생으로 통변할 것인가 상극적인 통변을 할 것인가도
이미 손님의 사주에서 찾아야 할 숙제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20대 손님을 대하면
상담자는 20대 눈높이로 몸가짐으로 상담을 해야 합니다.
50대 손님을 대하면
상담자는 50대의 몸가짐으로 상담을 해야 합니다.
통변은 결국 손님과 상담자와 통(通)하는 구변을 찾아야 하는 작업입니다.
통하지 않은 일방적인 상극적인 말은 거슬리고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드럽고 달콤한 말로 현혹해서도 돌아 서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상생과 상극을 적절히 조절하여 만족시켜줄 수 있는 통변을 궁리해야 합니다.
결국 고객충족의 원칙만큼이나 훌륭한 통변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억지춘양 이해시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는 통변을 찾아야 겠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눈이 옵니다.
눈이 하늘에서 내려 땅에 내려 쌓입니다.
통변은 결국 상대에게 필요한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나풀나풀
펑펑 눈처럼 내려 상대의 가슴속에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점쟁이의 말은 손님의 마음속에 오랜동안 기억되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책임감 있는 말을 하는 것에 급급하여 정작 손님을 소홀히 하면 곤란합니다.
진정 손님에게 꼭 필요한 말을 할줄 아는 것이 상담자의 덕이라 봅니다.
눈이 오니 통변 잘하시는 선생님이 존경스럽고 부럽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