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가이드#1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 사주

Mr.대산 | 2017-10-03 10:51:30

조회수 : 1,687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소설가
 
 
양력 : 1821년 11월 11일 巳시생 음력 : 1821년 10월 17일 巳시생
 
71 61 51 41 31 21 11 01
辛 壬 癸 甲 乙 丙 丁 戊 --- 己 甲 己 辛 : 61세 乾命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 巳 午 亥 巳
 
=> 월지 인수격에 일지 식상격인데, 火土가 강하여 旺土를 洩侮克설모극하는 金水木이 희신이다.
 
* 61세 癸巳대운 辛巳年 庚寅月 甲戌日 甲戌時 : 1881년 02월 09일 20:38분에 사망
=> 사망 시각이 火土가 강한 채 火克金, 土克水하여 흉하다.  寅巳 형살과 巳戌 원진살이 흉하다.
 
*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에 있는 마린스키 자선 병원의 관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의사로 가부장적이었으며 매우 엄격하고 거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자식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음.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 16살(한국 나이) 때까지 생가에서 지냈다.
 
* 1834년 형 미하일과 함께 모스크바의 체르마끄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했다.
 
* 17세 丁酉대운 丁酉年 : 1837년 천사 같은 존재였던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함. 이 해에 아버지는 장남 미하일과 열여섯 살이 된 차남 도스토옙스키를 공병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뻬쩨르부르그로 보냈다.
=> 대운과 연운에서 火克金하는 시기이다.
 
* 1838년 공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다.
 
* 19세 丁酉대운 己亥年 己巳月~庚午月 庚寅日 : 1839년 06월 06일 아버지가 영지의 농노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음. 이 시기에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괴롭힌 간질 발작이 처음 나타났다고 함.
=> 火土가 강한 시기이다.
 
* 21세 丙申대운 辛丑年 : 1841년 08월 도스토옙스키는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성 제도국 소위로 임관한다.
=> 본명은 丙申대운이 호운이다. 丙火는 수화상제해주는 희신이고 申中에 庚壬이 희신이다.
 
* 1844년 10월 문학으로 기우는 열정을 저버리지 못하고, 작가가 되어 문학에 전념하기 위하여 제대했다.
 
* 26세 丙申대운 丙午年 : 1846년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로 비평가 벨린스키로부터 '제 2의 고골리'라는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하였다. 데뷔는 화려했을지 모르나, 이어서 발표한 《백야》와 《분신》 등은 혹평을 면치 못했다. 이때부터 서구주의 사상에 끌리고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는 페트라셰프스키의 모임에 가담하였다. 
=> 丙申대운 丙午年은 丙火가 수화상제하여 호운이다.
 
* 29세 丙申대운 己酉年 : 1849년 04월 23일 5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음. 도스토옙스키는 모임에서 절대 왕정의 입장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고골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불온문서로 간주되었던 벨린스키의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한 것이 원인이다.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형집형 직전에 사면 받고 4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 운년에서 천간으로 火土가 조합돼 흉한 시기이다.
 
* 34세 乙未대운 甲寅年 : 1854년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 수형 생활을 한 후 풀려났다. 출소 후 세미팔란치스크 수비대에서 4년 간 사병으로 근무했다. 당시 남편이 있었던 여성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를 만난다.
=> 운년에서 木旺하여 호년이다. 寅木은 일간의 건록으로 혼인과 연관된다.
 
* 37세 乙未대운 丁巳年 : 1857년 마리야의 남편이 병으로 사망하자 도스토옙스키는 1857년 당시 29세였던 그녀와 결혼한다. 두 자식 출산.
=> 호운이라 볼 수 없다. 己丑生 여자는 巳酉丑 金局으로 巳火土를 변질시켜준다.
 
* 38세 乙未대운 戊午年 : 1858년 제대했다.
 
* 39세 乙未대운 己未年 : 1859년 그는 가까스로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뒤, 10년에 가까운 문학적 공백을 메꾸고자 의욕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 41세 乙未대운 辛酉年 : 1861년 형과 함께 잡지 《시대》를 발간하고, 《학대받는 사람들》 《죽음의 집 기록》을 연재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나,
=> 乙未대운은 木旺하고 辛酉年은 金旺한 해이다. 巳酉丑 金局으로 巳火土를 변질시키고 金生水해서 水용신이 강해지니 호운이다.
 
* 42세 甲午대운 壬戌年 : 이듬해 발행 금지를 당하였다.
=> 甲午대운은 甲木이 나타났지만 午火 사지를 만나 흉운이다.
 
* 44세 甲午대운 甲子年 : 1864년 형과 함께 새로운 잡지 《세기》를 창간하였으나 실패하여 큰 빚을 지게 되었다.
=> 甲午대운이 흉하다. 甲子, 乙丑年은 호년이지만 대운이 흉해서 무너진 것이다.
 
* 46세 甲午대운 丙寅年 : 1866년 걸작 《죄와 벌》을 완성하였다.
=> 丙寅年은 건록년에 수화상제하는 丙火가 투간한 해이다.
 
* 47세 甲午대운 丁卯年 : 1867년부터 외국, 특히 드레스덴에 4년간 거주하면서 《백치》 《악령》 등을 쓰고 귀국하였다. 이 해에 속기사였던 24년 연하인 안나 스니트키나와 결혼하였다.
=> 丁卯年은 양인년으로 호년이다.
=> 乙巳生 부인은 乙木이 木克土해주는 희신이다.
 
* 48세 甲午대운 戊辰年 : 1868년 후원자였던 형이 사망했다.
=> 甲午대운이 형제성인 비겁의 사지로 흉하다. 戊辰年은 土旺한 흉년에 辰亥원진살이 작동한다.
 
* 54세 癸巳대운 甲戌年 : 1874년 《미성년》을 발표하여 큰돈을 벌어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癸巳대운은 천간으로 용신이 나타난 대운이다. 壬申 癸酉年은 호년이다.
 
* 60세 癸巳대운 庚辰年 : 1880년 그의 최후의 걸작인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탈고하였다.
=> 癸巳대운 乙亥年, 丙子年, 己卯年, 庚辰年은 金水木이 강한 호운이다.
 
* 61세 癸巳대운 辛巳年 庚寅月 甲戌日 甲戌時 : 1881년 2월 9일 20시 38분에 폐동맥 파열로 인하여 가족의 간호를 뒤로하고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음.
=> 사망 시각이 火土가 강한 채 火克金, 土克水하여 흉하다.
=> 寅巳 형살과 巳戌 원진살이 흉하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러시아어: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듣기 (도움말·정보), 문화어: 표도르 미하일로비츠 도스또옙스끼, 1821년 11월 11일/구력 10월 30일 ~ 1881년 2월 9일/구력 1월 28일)는 러시아의 소설가이다.
 
[편집] 생애
[편집] 유년 시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이하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1월 11일(구력 10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모스크바 마린스키 자선병원 의사인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와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사이에서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 15살 때까지 생가에서 지냈다.
 
아버지 쪽이 귀족가문 출신이었지만 당시 러시아에서 의사의 신분은 중인 계급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이었으며 매우 엄격하고 거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자식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1834년 열세 살 때 형 미하일과 함께 모스크바의 체르마끄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한다. 1837년,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격으로 자녀들에게 천사 같은 존재였던 어머니 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어머니의 죽음은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1837년 아버지는 장남 미하일과 열여섯 살이 된 차남 도스토옙스키를 공병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뻬쩨르부르그로 보낸다.
 
1838년 도스토옙스키는 공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군사 교육을 받게 되었다. 소심하고 예민하며 병약했던 소년 도스토옙스키에게 군사 훈련은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문학은 유일한 위안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 습작을 서로 평가하고 논쟁을 벌이곤 하였다. 낭만주의 사조가 유행하던 시기로 도스토옙스키도 이 때 프리드리히 실러에 빠져 있었다.
 
1839년 6월 6일 아버지가 영지의 농노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부인이 죽은 후 영지로 내려가 생활했는데, 농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던 것이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뻬쩨르부르그에 있던 형제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전기 작가 O. 밀레르에 따르면 이 시기에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괴롭힌 간질 발작이 처음 나타났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에 있는 마린스키 자선 병원의 관사에서 태어났다.1841년 8월 도스토옙스키는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성 제도국 소위로 임관한다. 그러나 문학으로 기우는 열정을 저버리지 못하고, 작가가 되어 문학에 전념하기 위하여 1844년 10월 제대한다.
 
[편집] 문단 데뷔
 
1846년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로 비평가 벨린스키로부터 '제 2의 고골리'라는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하였다. 데뷔 전에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직접 작품을 건네받아 읽었던 네크라소프는 감동을 받은 나머지 밤중에 그의 집을 찾아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데뷔는 화려했을지 모르나, 이어서 발표한 《백야》와 《분신》 등은 혹평을 면치 못했다. 이때부터 서구주의 사상에 끌리고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는 페트라셰프스키의 모임에 가담하였다.
 
[편집] 정치적 수난
 
젊은 시절 도스토옙스키는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 를 중심으로 작가 등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 공상적 사회주의 를 신봉하는 급진적 정치 모임에 참가하였다. 당시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첩자를 보내 정치 모임들을 감시하였는데, 도스토옙스키는 모임에서 절대 왕정의 입장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고골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불온문서로 간주되었던 벨린스키의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한 것이 원인이 되어 1849년 4월 23일 5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체포된 지식인들을 사형에 처할 생각은 없었으나, 당시 확산되고 있던 급진주의 정치 모임들에 대해 경고하고자 직전에 특별 사면할 계획으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회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형 집행이 중지되고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나온 이 경험으로 인하여 몇몇 사람은 공포와 충격으로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도《백치》 등의 작품에 사형 집행 직전의 심정을 묘사하는 등 이 사건은 그의 작품 세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시베리아 유형은 감옥 수형과 출소 후에 수도로 복귀하지 못하고 시베리아에서 복무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1854년까지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 수형 생활을 한다. 성서 이외에는 일절 출판물이 허용되지 않았던 환경에서 성서에 대한 깊은 독서와 감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혔던 죄수와 민중들의 생생한 삶이 그로 하여금 사회주의자에서 기독교적 인도주의자로의 사상적 변화를 겪게끔 하였다.
 
이 시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후일 《죽음의 집의 기록》를 펴냈다. 출소 후 세미팔란치스크 수비대에서 4년 간 사병으로 근무하며 당시 남편이 있었던 여성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를 만난다. 마리야의 남편이 병으로 사망하자 도스토옙스키는 1857년 당시 29세였던 그녀와 결혼한다. 그는 가까스로 1859년에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뒤 10년에 가까운 문학적 공백을 메꾸고자 의욕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편집] 문학 활동
 
1861년 형과 함께 잡지 《시대》를 발간하고, 《학대받는 사람들》, 《죽음의 집 기록》을 연재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나, 이듬해 발행 금지를 당하였다. 1864년 형과 함께 새로운 잡지 《세기》를 창간하였으나 실패하여 큰 빚을 지게 되었다. 1866년 걸작 《죄와 벌》을 완성하였다. 1867년부터 외국, 특히 드레스덴에 거주하면서 《백치》, 《악령》 등을 쓰고 귀국하였다. 1874년 《미성년》을 발표하여 큰돈을 벌어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옴스크에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동상시베리아 유배 시절에 악화된 지병인 간질[1]과 취미로 즐기던 도박 등이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작품 속에 중요한 요소들로 간질과 도박 등이 자주 등장한다. 도박은 그의 인생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고, 빚을 갚기 위해 출판사와 무리한 계약을 하여 마감에 쫓기는 나날을 보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죄와 벌》, 《도박꾼》 등은 불러주는대로 받아적는 구술 필기의 형태로 작성되었다. 속기사였던 안나 스니트키나는 훗날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소설 이외의 저서로는 《작가의 일기》가 있다. 이것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잡지 《시민》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담당했던 문예란[2]에 게재했던 것으로, 문예 지평[3], 정치·사회평론, 에세이, 단편 소설, 강연 원고[4], 종교론[5] 등을 포함하고 있어 훗날 도스토옙스키 연구에 귀중한 문헌 자료가 되었다.
 
1880년 그의 최후의 걸작인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탈고하였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881년 1월 28일에 폐동맥 파열로 인하여 가족의 간호를 뒤로하고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유해는 같은 달 31일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사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편집] 평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거장 가운데 한 명으로 불리며 20세기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신흥 자본주의 압박 밑에서 신음하는 소시민층의 대변자인 동시에 열렬한 슬라브주의자였다.
 
그의 작품은 비단 문학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종교·사회 문제 등 각 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는 《죄와 벌》(1866년), 《카라마조프의 형제》(1879년 ~ 80년) 등이 있다. 진보적 사회 운동을 하다가 탄압받은 경험이 그의 문학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당시 퍼지고 있던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식층(인텔리겐치야)의 폭력적인 혁명을 부정하고, 기독교, 특히 정교회 교리에 바탕을 둔 기독교 사상을 담고 있다.
 
그의 기독교 사상은 기독교의 교리와 사상을 변증하는 호교론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을 행한 기독교의 폭력을 비판함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그의 소설은 흔히 이질적, 극단적 심리의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인간 심리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을 보여주고 당대 러시아의 정치, 사회, 정신세계 등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때로 그를 실존주의의 창시자로 여기기도 하는데, 발터 카우프만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지하실의 수기》를 "실존주의를 위한 최고의 서곡"이라 묘사한 바 있다.
 
[편집] 작품
 
가난한 사람들(Бедные люди), 1846
분신(Двойник: Петербургская поэма), 1846
네또츠까 네즈바노바(Неточка Незванова), 1849
아저씨의 꿈(Дядюшкин сон), 1859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Село Степанчиково и его обитатели), 1859
상처받은 사람들(Униженные и оскорбленные), 1861 (다른 번역 제목 : 학대받은 사람들)
죽음의 집의 기록(Записки из мертвого дома), 1862
지하생활자의 수기(Записки из подполья), 1864
죄와 벌(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1866
노름꾼(Игрок), 1867 (다른 번역 제목 : 도박사)
백치(Идиот), 1869
영원한 남편(Вечный муж), 1870
악령(Бесы), 1872
미성년(Подросток), 1875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1880
 
[편집] 주요 연구서
[편집] 평전
 
조셉 프랭크(Joseph Frank)의 도스토옙스키 평전(전5권)
Dostoevsky : a writer in his tim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0. (이하 5권의 압축판) Dostoevsky : the seeds of revolt, 1821-1849.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6. Dostoevsky: The years of ordeal, 1850-1859.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3. Dostoevsky. The stir of liberation, 1860-1865.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6. Dostoevsky. The miraculous years, 1865-1871.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5. Dostoevsky: The mantle of the prophet, 1871-1881.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2.
에드워드 헬렛 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 열린책들, 2011.
얀코 라브린, 《도스토예프스키》, 한길사, 1997.
미하일 바흐친,《도스토예프스키 시학》, 정음사, 1989.
콘스탄틴 모출스키, 《도스토예프스키 1, 2》, 책세상, 2000.
 
[편집] 한국 연구자들에 의한 책
 
정창범, 《도스토예프스키》, 건국대학교출판부, 1994.
곽승룡, 《도스토예프스키의 비움과 충만의 그리스도》, 가톨릭출판사, 1997.
이득재, 《도스토예프스키, 도시에 가다》, 문화과학사, 2001.
홍대화, 《도스또예프스끼》, 살림, 2005.
권철근, 《도스토예프스키 장편소설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6.
조주관, 《죄와 벌의 현대적 해석》, 연세대학교출판부, 2007.
석영중,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예담, 2008.
이덕형,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산책자, 2009.
이병훈,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문학동네, 2012.
 
[편집] 기타
 
메레지코프스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 인간과 예술》, 금문, 1996.
슈테판 츠바이크,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자연사랑, 2001.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또예프스까야, 《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한 나날들》, 그린비, 2003.
이종진 편역, 《도스또예프스끼 대심문관》,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4. (〈대심문관의 이야기〉텍스트, 도스토옙스키 기념 강연(솔로비요프), 대심문관 전설(로자노프), 철학적 유형으로서의 이반 까라마조프(불가꼬프), 대심문관과 새로운 악마성(베르쟈예프), 대심문관과 혁명적 사회주의(프랑크), 대심문관과 자유의 문제(이종진) 수록)
앙드레 지드, 《앙드레 지드, 도스토예프스키를 말하다》, 고려문화사, 2005.
시미즈 마사시,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지 않은 것들》, 열린책들, 2011.
마르끄 슬로님, 《도스또예프스끼와 여성》, 열린책들, 2011.
베르자예프, 《도스트예프스키의 세계관》, 행복한박물관, 2011.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정수로 평가하기를 아무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완으로 남겨두고 그는 60세가 되던 해 눈을 감고 말지요.
 
1821년에 태어나 1881년에 생을 마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으로 인해 주로 빚을 갚으려고 소설을 썼던 사람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위대함은 부당하게 학대받는 사람들의 운명을 뼈아프게 느끼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 곁에 서려고 노력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색과 도박과 신경증, 신경질적이고 예민해서 사람을 경계하는 본능적 기질을 타고 났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타고난 기질을 운명적 기질이라 생각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일생동안 빚더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빚을 갚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빚은 그를 옭아매고 그를 불행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빚으로 인해 그를 둘러싼 식구와 자신이 먹고 살아야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이 아이러니 하게도 위대한 대문호에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러시아의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의 발레에서 묘사하듯 종교와 철학을 아우릅니다 .
 
도스토예프스키의 기질은 그의 글을 대하는 사람들 모두 자신의 타고난 기질과 비교해보면 심정적으로 공감될 뿐 아니라 살짝 반하게 됩니다. 지금도 그의 인간적 측면에 동감의 부피가 더 두터워 지는 것 같습니다.
 
8형제의 둘째로 태어난 도스토예프스키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병원사택으로 유리창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좁은 방에서 책읽기를 주로하며 보냈습니다. 그것은 인간관계가 서툴고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라는데요.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정교사가 프랑스인 이었던 것을 보면 불어공부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거 같습니다. 13세에 발자크의 저서를 번역 하는걸 보면요.
 
기숙학교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친구와 담쌓고 구석에서 책읽기를 하는 그는 비사회적인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국가가 운영하는 병원에 의사로 근무하는 아버지를 둔 도스토예프스키는 딱딱한 관료주의에 젖은 식구들이 모여 큰소리로 라틴어를 읽거나 성경책과 문학책을 주로 읽게 되는데 이것은 아버지가 주도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생활은 자연히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상상의 날개를 펴는 공간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강력한 자기 집중력을 가진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신적인 청년으로 성장합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저 그런 의사였던 아버지의 신분이 상승되어 귀족의 시골 영주가 되는 통에 잠시나마 그의 집은 가족과 단란했던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이 시기에 체험한 일들이 나중 그 유명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합니다.
 
15세 되던 해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농민들을 박해했던 그의 아버지는 농민들로부터 참혹하게 살해당합니다. 이 사건은 훗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아버지를 모델로 물욕과 음탐의 상징인 표도르란 인물이 탄생되지만요.
 
아버지의 사망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유산을 받았으나 우울증과 낭비벽으로 상속받은 유산을 삽시간에 다 쓰고 사관학교에 입대합니다. 이때 발표한 첫 작품이 <가난한 사람들>인데 당시 문단의 평론가였던 벨린스키가 “새로운 고골리가 출현했다”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페테르부르크 시절 가난에 시달리면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다 보니 25세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느새 유명한 문학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전히 성격적으로는 불안정했고 28세 되던 해는 왕권정치에 대한 반발 의식으로 사회주의 유토피아 등 요즘으로 치면 뜻을 같이하는 동호회 같은 것이겠지요. 그들의 모임은 시대를 고민하는 젊은 청년들이었습니다.
 
동호회 "페트라셰프스키'가 발족되어 더 낳은 미래에 대한 꿈을 나누게 되는데 마침 불란서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 왕은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고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을 감시하게끔 합니다.
 
결국 이일로 도스토예프스키와 형을 포함해 34명이 체포되고(나중 형은 빠지게 됩니다) 그중 21명이 사형언도를 받게 됩니다.
 
사형장에 끌려가던 중 특별사면을 받고 시베리아에서 4년의 형을 살고 4년의 군복무를 하게 된 처음의 배경은. 러시아 왕정이 이들 젊은 문학도들을 구속한 것은 한번 혼찌금이나 내보려고 한 일이었다고 나중에 알려지게 되었지만요.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당시 경험한 것을 배경으로 생생한 삶의 현장을 그리는데 리얼리티의 진수를 보여주게 됩니다.
 
사형장에 끌려갔던 공포와 고통의 시베리아 형무소 생활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여러 종류의 죄수를 보며 과연 죄인은 누구이며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인 룰에 고민합니다.
 
또한 감옥에서 허용되는 책은 성경책뿐이었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날마다 성경책을 읽다보니 성경을 줄줄이 외웠을 것입니다. 이것은 훗날 그가 쓰는 소설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신과 인간의 질문이 되었지요.
 
시베리아 형무소에서 보낸 도스토예프스키는 발에 채워진 족쇄와 끊임없는 감시, 영하 20'~30도의 추위와 만성적인 허기, 이름 모를 병과 처절한 고독. 수인들은 인간의 극한 상황에서 짐승처럼 살 존재들이 아닌 것을 보며 “나는 감옥에 와서 비로소 인간이 우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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