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가이드#1

전 이태리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 사주

Mr.대산 | 2017-10-03 10:53:17

조회수 : 1,470

양력 1883년 7월 29일 13:10 음력: 1883년 6월 26일 13:10
시간 보정=12도 x 4분 = 48분, 13시 10분-48분= 12시 22분 : 庚午時
 
67 57 47 37 27 17 07
壬 癸 甲 乙 丙 丁 戊 --- 庚 甲 己 癸 : 63세 乾命
子 丑 寅 卯 辰 巳 午 --- 午 戌 未 未
 
=> 본명은 재생살국에 살인화생하는 癸水가 용신이고 金이 희신이고 木이 약신이다. 신약 명조이므로 간단히 일간 甲木을 용신으로 봐도 된다. 본명은 庚金 칠살을 용신으로 보고 癸水를 희신으로 볼 수도 있다. 土를 중심으로 火土조합이나 土金조합은 흉하다.
 
67 57 47 37 27 17 07
壬 癸 甲 乙 丙 丁 戊 --- 庚 甲 己 癸 : 63세 乾命
子 丑 寅 卯 辰 巳 午 --- 午 戌 未 未
 
87 77 67 57 47 37 27 17 07.10
癸 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 ○ 甲 壬 壬 : 坤命 (본인 : 뭇솔리니 애인)
巳 午 未 申 酉 戌 亥 子 丑 --- ○ 戌 寅 子
 
=> 坤命은 木旺하여 洩侮克설모극하는 火土金이 희신이다. 乾命과는 오행적으로 기신이반대끼리만났다.
 
* 24세 庚子대운 乙亥年 이후 죽을 때까지 10여 년간 무솔리니의 애첩으로 지냈다.
 
=> 坤命은 庚子대운중 庚대운은 호운이지만 子대운과 乙亥年은 흉운이다.
* 34세 己亥대운 乙酉年 04월 28일에 총살당했다.
 
=> 己亥대운은 亥中 壬甲이 기신이고, 乙酉年은 乙木이 기신이고 酉寅원진살이 흉하다.
 
=> 아래 정보에 松栢이 길운은 파란색으로 흉운은 빨간색으로 표시했습니다. 참고하세요.
 
67 57 47 37 27 17 07
壬 癸 甲 乙 丙 丁 戊 --- 庚 甲 己 癸 : 63세 乾命 (이탈리아 뭇솔리니 명조)
子 丑 寅 卯 辰 巳 午 --- 午 戌 未 未
 
* 부친은 대장장이이자 아나키즘 활동가. 모친은 교사. 삼 형제 가운데 장남.
 
* 戊午대운 戊戌年(?) : 수도회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말썽으로 퇴학 처분 받음.
 
* 19세 丁巳대운 辛丑年 : 1901년 새로운 학교에서 공부 잘하여 우등생으로 졸업.
* 20세 丁巳대운 壬寅年 : 1902년 무솔리니는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스위스로 이민.
* 22세 丁巳대운 甲辰年 : 1904년 스위스는 무솔리니를 이탈리아로 추방하였다.
- 이탈리아 정부는 무솔리니가 군 입대를 자원하자 병역 기피에 대한 처벌을 면제하여 주었다.
 
* 23세~24세 丁巳대운 乙巳年~丙午年 : 1905년부터 1906년까지 2년간 군복무를 치르고 제대하였다.
 
* 26세 丁巳대운 戊申年 : 1908년 02월 무솔리니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던 트렌토로 가서 노동당 서기가 되었으며, 지역 사회주의당의 당원으로 가입하고 지역 정치 신문 《라보니레 델 라보라토레》(이탈리아어: L'Avvenire del Lavoratore, 노동자의 미래)의 편집진이 되었다.
 
* 28세 丙辰대운 庚戌年 : 1910년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잠시 체류하며 활동 보고를 끝낸 뒤 고향인 포를리로 돌아가 주간지 《로타 디 클라세》(이탈리아어: Lotta di classe, 계급 투쟁)의 편집진이 되었다. 이 기간에 무솔리니는 급진적인 잡지 《라 보체》(이탈리아어: La Voce, 목소리)에 〈사회주의자의 시각으로 본 트렌토〉(이탈리아어: Il Trentino veduto da un Socialista)을 기고하였다. 그는 반기독교운동을 내세운 소설 《추기경의 애인》을 상티 코르바야와 함께 집필하여 1910년 《일 트렌토》에 발표하였다. 후일 무솔리니는 교황청과 화해하였다.
 
- 1910년 이후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에서 사회주의 운동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지가 흉하다.
 
* 29세 丙辰대운 辛亥年 : 1911년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를 점령한 것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이를 규탄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5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석방된 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사회당 내에서 전쟁을 지지한 "수정주의자" 이바노에 보노미, 레오니다 비솔라티 등과의 정쟁에서 승리하였고, 사회당의 기관지 《아반티!》(이탈리아어: Avanti!, 전진!)의 편집장이 되었다. 무솔리니는 2만명에 불과하던 기관지의 독자를 10만 명으로 늘렸다.
 
* 31세 丙辰대운 癸丑年 : 1913년 무솔리니는 얀 후스의 전기 《참 예언자, 얀 후스》를 출간하였다. 무솔리니의 사회주의 활동은 정부 기관의 주목을 받았으며, 밀라노의 치안감 G. 가스티는 그에 대한 내사 자료를 작성하여 보고하였다.
 
* 32세~33세 丙辰대운 甲寅年~乙卯年 : 1915년 12월 25일 무솔리니는 라첼레 귀디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플로리 시절부터 무솔리니와 동거하였으며, 1910년에 이미 딸 에다를 낳았다. 라첼레 무솔리니는 트렌토 인근의 소프라몬테 출신의 여성이다. 달세르와도 내연의 관계에 있었으며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
 
* 34세 丙辰대운 丙辰年 : 1916년 01월 16일이 되어서야 무솔리니는 자신의 아들을 법적으로 인정하였다. 지지가 흉하다.
 
* 35세 丙辰대운 丁巳年 : 1917년(35세) 군복무 시절의 무솔리니베니토 무솔리니는 실지 회복주의자 체사레 바티스티와 연대하는 정치가로 변모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무솔리니는 바티스티와 같이 참전하였다. 정부의 내사자료에 따르면 "무솔리니는 전장에서 수류탄 폭발로 인해 중상을 입었다." 무솔리니는 후일 자서전에서 자신이 9개월 동안 전선에서 복무했으며 그동안 장티푸스를 앓았다고 진술하였다. 그는 폭발로 인해 몸에 40여개의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고 전역하였다.
 
- 8월 병상에서 전역한 무솔리니는 《일 포폴로 디탈리아》의 편집장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문에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대한 글을 실었다.
 
* 36세 丙辰대운 戊午年 : 1918년 초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재건을 위해 "모든 문제점을 일거에 일소하기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무솔리니는 "사회주의 이론은 죽었다. 남은 것은 원한뿐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 발언은 무솔리니가 남긴 말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되었다.
 
* 36세 丙辰대운 己未年 : 1919년 03월 23일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200여명으로 구성된 최초의 파쇼 《일 파르시 이탈리아니 디 콤바티멘토》(이탈리아어: Il Fasci Italiani di Combattimento, 파쇼 이탈리아 전투 분대)를 창립하였다. 파시즘은 급격히 세를 늘려갔음. 庚申年이 길년이다.
 
* 39세 乙卯대운 辛酉年 : 1921년(39세) 로마에서 《국가 파시스트당》(이탈리아어: Partito Nazionale Fascista)을 창당하였다. 같은 해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무솔리니는 1911년부터 1938년까지 유대인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마게리타 사르파티와 함께 일했는데, 이 때문에 그녀는 "파시즘의 유대인 어머니"라 불린다.
 
* 40세 乙卯대운 壬戌年 : 1922년 10월 27일에서부터 29일까지 무솔리니와 《국가 파시스트당》은 로마 진군을 감행하였다. 검은 셔츠단을 앞세운 이 쿠데타로 인해 총리 루이기 파크타는 실각하였다. 10월 28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03세는 무솔리니의 권력 획득을 인정하였다. 무솔리니는 군부, 자본가, 그리고 우익의 지지를 등에 업고 총리가 되었다.
 
* 41세 乙卯대운 癸亥年 : 1923년 파쇼 조직인 《일 파르시 이탈리아니 디 콤바티멘토》를 무장시켜 《국가안보 의용군》(이탈리아어: Milizia Volontaria per la Sicurezza Nazionale)로 전환하였다. 한편 무솔리니는 국유지 불하, 임대법의 완화, 노동조합 해산과 같은 일련의 법안을 통과시켜 부유한 상공업자와 지주 계급의 이익을 보장하여 주었다. 최길운이다.
 
- 1923년 무솔리니는 케르키라 섬을 침공하여 코르푸 사건을 일으켰다. 국제 연맹은 이미 이름뿐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는 이탈리아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 1923년 06월 아체르보 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이탈리아 전역을 단일 선거구로 하고 의회 의석의 3분의 2를 총선에서 25% 이상의 지지를 획득한 정당에게만 배분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것이었다.
 
- 1923년에 케르키라 섬을 침공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솔리니는 알바니아에 괴뢰 정권을 세우는 데 성공하였으며 1912년 지배력을 상실하였던 리비아에 대한 지배를 재개하였다.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이탈리아어: Mare Nostrum, 우리 바다)로 만드는 것은 무솔리니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는 지중해 제패를 위해 그리스 레로스 섬에 해군 기지를 구축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무솔리니가 추진한 1925년의 로카모 조약과 1933년의 4강 협정은 그를 유능한 "정치가"로 인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 42세 乙卯대운 甲辰年 : 1924년 04월 06일 아체르보 법에 의한 첫 총선이 열렸다. 파시스트당을 중심으로한 "국가 동맹"은 64%의 지지를 획득하였으나 이는 선거 기간 중 파시스트의 폭력과 협박이 난무한 가운데 얻어낸 것이었다. 이러한 파시스트의 폭력은 특히 이탈리아 남부에서 극심하였다.
 
- 1924년 검은 셔츠단은 집회를 갖고 무솔리니에게 그의 모든 반대자가 붕괴되었음을 보고하였다. 무솔리니는 자신의 무력을 과시하며 모든 민주주의의 덫을 치워버렸다고 선언하였다.
 
* 43세 乙卯대운 乙巳年 : 1925년 01월 03일 무솔리니는 의사당 앞에서 검은 셔츠단의 모든 폭력은 자신이 책임질 것이며 반대파는 붕괴될 것이라는 흉폭한 연설을 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검은 셔츠단이 저지른 마테오티의 암살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 44세 乙卯대운 丙午年 : 1926년 04월 07일 아일랜드 여성 바이올렛 깁슨은 암살을 시도했으나 무솔리니의 "코에 약간의 상처를 입혔다". 10월 31일에는 볼로냐에서 15살 된 소년 안테오 잠보니가 무솔리니를 향하여 발포한 적도 있었다. 아나키스트 기노 루체티 역시 무솔리니의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미국인 아나키스트 마이클 시루도 무솔리니를 암살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 1926년 04월 03일 통합 파시스트 청소년 단체인 《오페라 나쇼날레 발릴라》(이탈리아어: Opera Nazionale Balilla, ONB, 전국소년회)의 창립을 승인하였다. 리치는 이후 11년간 ONB의 총재를 맡았다. ONB는 08세부터 18세까지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유년대인 《발릴라》와 청소년대인 《아방가르디스티》(이탈리아어: Avanguardisti, 선봉대)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 42세~44세 乙卯대운 乙巳年~丁未年 : 1925년부터 1927년 사이 무솔리니는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거추장스러운 헌법 조항들을 폐기하고 이탈리아를 경찰국가로 변모시켰다.
 
* 42세~43세 乙卯대운 丙午年~丁未年 : 1925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통과된 법에 따라 무솔리니는 공식적으로 "행정 수반"이자 "국가 원수"가 되었다. 이로서 그는 더 이상 의회의 동의를 기다릴 필요없이 국왕을 끌어내릴 수 있었다. 또한 이 법에 따라 지방자치는 폐지되었으며 이탈리아 상원 역시 해산되었다. 1925년부터 무솔리니는 최고 통치자를 뜻하는 두체(Duce)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 45세 乙卯대운 丁未年 : 1927년 무솔리니는 세례를 받아 카톨릭에 화해의 신호를 보냈다.
 
* 46세 乙卯대운 戊申年 : 1928년에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이 금지되었다. 같은 해 이탈리아 의회가 해산되고 파시즘 대의회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파시즘 대의회는 이미 5년 전 조직되어 있었으나 헌법 기구로 격상되어 국가 주권을 대표하게 되었다. 법률상으로는 파시즘 대의회에 무솔리니의 업무를 정지시킬 권리가 있었고 이론적으로는 탄핵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솔리니만이 파시즘 대의회를 소집하고 안건을 제출할 수 있었다. 무솔리니는 시칠리아와 같은 남부 지역의 통치를 위해 체사레 모리를 팔레르모의 지사로 임명하였으며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마피아의 뿌리를 뽑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모리는 1927년 마피아와 결탁하였다는 증거가 드러나 1929년 해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가 마피아를 근절시켰다고 선전하였고 모리를 상원 의원으로 격상시켰다.
 
- 1928년 "토지 전투"를 선언하고 광범위한 간척 사업을 전개하였다. 폰티네 습지의 개간과 간척 사업은 농업 정책의 가장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로 치부되었으며, 실업률의 개선과 함께 파시즘의 성과로서 선전되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최소 1만 명 이상의 농민이 이주하여야 하였다. 또한 1940년에 이르러 결국 "곡물 전투"와 "토지 전투" 정책은 폐기되었고 폰티네 습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다시 늪이 되었다.
 
* 47세 乙卯대운 己酉年 : 1929년 무솔리니는 바티칸 시국과 라테란 조약을 맺고 국경 문제를 해결하였다. 무솔리니의 반공주의는 많은 카톨릭 신도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1929년 교황 비오 11세는 파시즘이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교서를 반포하여 파시즘과 대립하였다.
 
* 53세 甲寅대운 乙亥年 : 1935년 무솔리니는 기업에 대한 국유화를 추진하여 같은 해 모든 은행을 포함한 이탈리아 내 기업의 4분의 3이 국유화되었다. 또한 개인은 자신이 보유한 외국 기업의 주식을 국가에 납부하여야만 하였다.
 
- 1935년까지 무솔리니는 스트레사 전선 계획에 따라 서방 측과 공조하여 독일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켜 에티오피아를 침략하면서 그간의 외교관계를 극적으로 전환하여 독일의 편에 선다.
 
- 1935년 10월 팽창주의를 추구한 이탈리아 파시즘은 결국 에티오피아를 침략한다. "아비시니아"(라틴어: Abissinia, 에티오피아의 라틴어 이름)에 대한 이탈리아 군대의 침공은 공습을 앞세우고 신속히 진행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의 승리를 선포한다. 에티오피아 제국의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탈리아 군은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고 에티오피아를 병합하여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로 개칭하였다. 이로서 유럽의 열강들이 앞 다투어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만들던 이른 바 아프리카 분할이 완료되었다. 20세기 세계 각지에서는 식민지에 반대하는 독립 운동이 한창이었고 이탈리아의 침략 행위는 비난받았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무솔리니의 지시에 의해 이탈리아가 사용한 머스터드가스, 포스겐과 같은 독가스는 대표적인 반인륜적 무기 사용으로 지목되었다.
 
* 54세 甲寅대운 丙子年 : 1936년(54세) 이후 무솔리니의 공식 칭호는 "정부 수반이자 파시즘의 두체이며 제국의 설립자이신 불세출의 베니토 무솔리니"[주해 1]였다. 또한 무솔리니는 스스로 제국 제일 원수 계급을 제정하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함께 이 칭호를 사용하여 이탈리아 군의 통수권을 행사하였다.
 
- 1936년 07월 21일 무솔리니는 공군 전투비행단 선발대를 스페인으로 파견하여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였다. 이탈리아군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프랑코를 지원하였다. 이 결과 이탈리와와 프랑스, 영국의 관계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무솔리니는 아돌프 히틀러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
 
* 55세 甲寅대운 丁丑年 : 1937년 국제연맹을 탈퇴함.
 
* 56세 甲寅대운 戊寅年 : 1938년에는 반파쇼 그룹인 TIGR의 회원이 카바리드에서 무솔리니를 암살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1938년부터는 정부의 가격 통제를 실시하였다. 그는 독일을 제외한 모든 외국과의 무역을 단절함으로써 이탈리아를 자급자족 경제 체계로 만들었다.
 
* 57세 甲寅대운 己卯年 : 1939년 04월 세계의 이목이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쏠려있는 틈을 타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였다. 알바니아는 5일 만에 점령되었으며 국왕 아흐메트 조그 1세는 망명하였다.
 
- 1939년 05월 독일과 이탈리아는 "양국의 우호와 동맹"을 약속하는 이른 바, "철의 조약"을 체결하여 추축국을 결성하였다.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전통적인 우방 프랑스를 버리고 독일을 택한 이 조약에 우려를 표명하였다.
 
- 1939년 09월 0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즉각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는 즉각적으로 참전하지는 않았다.
 
* 58세 癸丑대운 庚辰年 : 1940년 상반기가 되자 전황은 독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독일의 승전으로 전쟁이 조속히 종결되리라 판단하였고, 1940년 6월 영국과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탈리아는 독일의 우군으로서 프랑스 공방전에 뛰어들었다. 이탈리아가 참전한 지 11일 뒤 프랑스는 추축국에 항복하였다. 이 동안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는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로 진격하였다. 이 전쟁을 동아프리카 전역이라 부르며, 이탈리아군은 수단, 케냐, 영국령 소말릴란드같은 영국의 동아프리카 식민지들을 공격했다.
 
- 1940년 06월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함.
- 1940년 08월 03일 영국령 소말릴란드가 이탈리아령 아프리카에 편입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케냐와 수단도 같은 처지가 되었다.
 
- 1940년 09월 로돌포 그라치아니 장군 휘하의 이탈리아 10군은 영국군을 추격하여 이탈리아령 리비아에서 이집트까지 진군하는 서부 사막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탈리아군은 사막 횡단에 성공하였으나 시디 바라니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송대가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하여 진군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 1940년 10월 25일 무솔리니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 나선 독일을 지원하기 위해 이탈리아 공군을 벨기에에 두 달 동안 파견하였다. 같은 달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군을 그리스로 보내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을 일으켰다. 개전 초기에는 이탈리아가 승리하는 듯하였으나 곧이어 그리스군의 강력한 반격이 시작되었고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의 4분의 1을 포기하여야만 하였다. 이에 독일은 곧바로 지원군을 발칸 반도로 파견하여 연합국과 교전하였다.
 
- 1941년 아프리카 전선에서 컴파스 작전이 시작되어 이탈리아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리비아로 후퇴하였다. 또한 저항군의 반격을 제압하지 못하고 지속되고 있던 동아프리카에서도 연합군의 반격에 직면하였다. 이탈리아군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를 이룬 연합군과 싸운 케렌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아프리카의 이탈리아군은 곤다르 전투에서 대패한 후 수세적 입장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무솔리니는 최후의 승리는 파시즘의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큰소리 쳤다. "빵먹고 술마시고 빵먹고 술마시고 그러라고 하자. 적들이 전투 한 번 이겼다고 해도 쓸데없는 짓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영국은 가망없는 위선을 떨고 있다. 두고보면 그들이 더이상 위선을 떨지 못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큰소리와는 달리 이탈리아는 더 이상 아프리카 전선을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독일이 아프리카 군단을 파병하게 된다. 이 동안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마리타 작전을 끝으로 추축국은 그리스 공방전에서 승리한다.
 
* 59세 癸丑대운 辛巳年 : 1941년 06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무솔리니는 소련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군대를 진군시켰다. 이후 일본제국이 진주만 사건을 일으키자 이탈리아는 미국에도 전쟁을 선포하였다.
 
* 60세 癸丑대운 壬午年 : 1942년(60세) 이후 전황은 이탈리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제2차 엘 알라마인 전투에서 추축국은 크게 패하였으며 동부 전선에서도 대대적인 후퇴가 계속되고 있었다.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이 시작되자 이탈리아는 패배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연합국의 이탈리아 본토 폭격이 시작되었고 공장이 온전한 곳도 석유, 석탄과 같은 자원을 공급받지 못하였다. 여기에 더해 곡물 수급이 중단되자 곡물 가격이 폭등하였다. 지지가 흉하다.
 
* 61세 癸丑대운 癸未年 :1943년이 되자 무솔리니의 선전술은 더 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티칸 라디오나 라디오 런던을 들으며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03월이 되자 이탈리아 북부 공업도시에서 1925년 이래 최대의 파업이 시작되었다. 또한 최대의 공업도시 밀라노와 토리노는 공습을 피해 노동자 가족들을 소개하면서 생산이 멈췄다. 사람들은 이탈리아를 대하는 독일의 태도로 인해 이를 묵인하는 무솔리니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시칠리아에 연합국이 상륙하자 사람들은 자유주의의 회복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지지가 흉하다.
 
- 일찍이 무솔리니는 아프리카 전선과 튀니지에서 패퇴하자 히틀러에게 스탈린과 평화 조약을 맺고 서부 전선으로부터 공격해오는 연합국과의 전쟁에 집중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아프리카와 튀니지를 얻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겨눌 다음 목표는 당연히 이탈리아 반도 본토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칠리아에 연합국이 상륙한 지 며칠이 지난 후 무솔리니는 해외 군대의 회군을 지시하였다.
 
- 1943년 07월 19일 놀란 히틀러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무솔리니와 회동하였다. 무솔리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더 이상 독일의 말만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 분명히 하였다. 무솔리니는 이날 역사상 최초로 로마가 폭격을 당했다는 최악의 소식을 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일부가 무솔리니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에는 그란디와 함께 무솔리니의 사위였던 갈레아초 치아노도 포함되어 있었다.
 
- 1943년 07월 24일 파시스트 대의회는 전쟁을 시작한 후 최초로 "두체"를 소환하였다. 그 자리에서 무솔리니가 독일이 남부에서 철군하려 한다고 보고하자 그란디는 무솔리니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란디는 무솔리니의 불신임을 요청하였고 대의회는 19 대 7로 이를 가결하였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대의회는 자문 기관일 뿐 자신의 입지에 대한 어떠한 결정도 무효라 주장하며 다음날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보았다. 그날 오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왕궁으로 불러 해임을 통고하였다. 무솔리니는 해명하려 하였으나 국왕은 이를 일축하고 후임자로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내정하였음을 통지하였다. 무솔리니는 왕궁을 나오자마자 근위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무솔리니에 대한 불만이 사회 전반에 팽배하여 있었기 때문에 그의 체포 소식에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무솔리니의 행방을 독일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비밀 유지에 힘쓰면서 그를 아브루초 주의 산악지대인 캄포 임페라토레에 격리시켜 구금하였다.
 
- 새로 출범한 바돌리오 정부는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의 반발을 의식해 출범 즉시 "이탈리아는 여전히 독일의 우방"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사회 혼란을 잠식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바돌리오는 이러한 성명과는 달리 출범 이틀 만에 국가 파시스트당을 해산시켰고 연합국과의 휴전 협상을 개시함 .
 
- 1943년 09월 03일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바돌리오 정부의 휴전 조약 발표는 이탈리아 전역을 혼란으로 몰고 갔으며 내전의 조짐마저 보였다. 이러한 상황은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비토리오 이마누엘레 3세와 바돌리오는 폭동을 피하여 로마를 떠나야 하였다.
 
- 1943년 10월 13일 잠시 동안의 무정부 상태가 있은 뒤 바돌리오 정부는 몰타에서 나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상당수의 이탈리아군은 여전히 파시스트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새 정부의 명령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바돌리오 정부를 지지하여 움직인 군대는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바돌리오 정부는 좌익 계열의 이탈리아 파르티잔과 연대하여 독일에 맞서게 되었다.
 
- 캄포 임페라토레의 그란사소 호텔에 연금되었던 무솔리니는 나치 독일 무장 친위대의 오토 스코르체니 중령이 이끈 공수부대와 친위대로 편성된 구조대에 의해 구출된다. 무솔리니의 구출과 함께 이탈리아로 진군한 독일군은 왕가와 내각 인사를 체포하고 무솔리니의 권력을 회복시키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구출 당시 무솔리니는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동프로이센으로 데려와 회동하였다. 히틀러는 그 자리에서 무솔리니가 이탈리아로 돌아가 파시스트 국가를 재건하기를 바라면서 독일군이 밀라노, 제노바, 투리노 등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밝혔다.
 
- 1943년 09월 23일 이에 동의한 무솔리니는 살로에서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망명 정부의 수반이 된다. 그러나 이 망명 정부는 나치 독일의 이탈리아 전선 유지를 위한 명분에 불과한 괴뢰 정부였으며 실재적인 정부로서 기능하지는 못하였다. 무솔리니는 새로운 정부를 세우자 자신을 배반한 파시스트 대의회의 요인 몇 명을 처형하였다. 무솔리니의 사위 가레아초 치아노도 이때 처형되었다. 이 기간 동안 무솔리니는 1928년 출판하였던 자서전의 개정판 《나의 흥망》을 집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 63세 癸丑대운 乙酉年 : 1945년 04월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무솔리니는 연인이었던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그는 스위스를 거쳐 스페인으로 망명할 생각이었다. 천지극으로 흉하다.
 
- 1945년 04월 27일 공산주의 계열의 파르티잔인 제52 가리발디 여단 정치부 소속 우르바노 라차노는 코모 호 인근의 마을 동고에서 무솔리니와 페타치를 체포하였다. 체포 당시 무솔리니는 독일군으로 위장한 병사들과 함께 독일 장교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 1945년 04월 28일 유격대의 봉기로 나치스·파시스트의 지배는 끝이 났고 스위스로 도피하려던 무솔리니는 코모 호반(湖畔)에서 애인(Carla Pettaci 클라라 페타치: 1912년 2월 28일~1945년 4월 28일)과 함께 붙잡혀 두 사람 전부 총살로 처형당하였다.
 
- 무솔리니와 페타치는 메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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