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金昌龍)
양 력: 1916년 8월 16일 김창룡
음/평: 1916년 7월 18일 남자
시 일 월 년
乙 乙 丙 丙
酉 酉 申 辰
辛 庚 己 戊 丁 대운: 순행
丑 子 亥 戌 酉
57 47 37 27 17 7.9
대운 시작: 7세 9월 20일
사망 일시: 1956년(40세) 1월 30일 암살당함. (경자대운 을미년)
(출생일자는 아래 글에서 발췌한 것을 음력으로 본 것이며 출생시는 도무사가 추정한 것임.)
김창룡은 묘비나 공식문서에는 1920년생으로 되어 있으나 스스로 남긴 기록에 따르면 1916년 7월 18일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 일산리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세 -- 4년제 덕성사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5세 -- 졸업한 뒤 2년제 영흥공립농잠실습학교를 거쳐
17세 -- 가다꾸라(片倉) 제사(製絲)회사에 취직하였다.
19세 -- 2년 만에 이 회사를 나와 만철(滿鐵)소속 신경(新京, 현재의 장춘)역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21세 -- 여기서도 2년 동안 역원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뒤 일본인의 추천을 받아 일본헌병부대 군속으로 들어갔다.
1940년(25세) -- 3년 동안이나 고된 일과 강추위 견디며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부은 결과 1940년 초 관동군 소속 헌병보조원이 되었다. 신경에 있는 헌병교습소에서 교육을 받고 김창룡은 드디어 관동군 헌병 이등병이 되었다.
1941년(26세) -- 소만(蘇滿)국경 부근에 파견되어 사복으로 갈아입고 중국과 소련공산당의 움직임을 살피는 첩보활동을 폈다.
1943년(28세) -- 김창룡은 북만주에서 중국공산당의 거물인 왕근례(王近禮)를 상대로 정보활동을 펴서 그를 체포하게 하였다. 관동군 헌병대는 왕근례를 이용하여 역공작을 펴 만소국경일대에서 9개 지하조직 50여명을 체포하였다. 이 '공로'로 김창룡은 관동군 오장(伍長;하사급/분대장)이 되었고, 다시 공장지대에 들어가 2년간 50여건이 넘는 비밀 조직을 적발하였다.
1945년(30세) -- 해방 뒤 고향으로 돌아온 김창룡은 친일 경력 때문에 숨어 지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게 두 차례나 체포되었으나 그때마다 탈출하였다고 한다.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이아니라 '독립군'이었다면 그 탈출은 감동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46년(31세) -- 이남으로 내려온 그는 할 일이 마땅치 않아 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갔다. 헌병 오장 출신이 2등병으로 졸병노릇을 하려니 일마다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일제 때 헌병 오장이 떴다하면 면장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마을길을 청소시킬 정도로 대접을 받았는데 말이 아니었다.
1947년(32세) -- 얼마 되지 않아 졸병 생활을 버리고 1월에 조선경비대 사관학교에 3기생으로 들어갔다. 그때는 사관학교 한기의 훈련기간이 고작 3∼4개월 정도였다. 김창룡은 4월에 소위로 임관되어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일제 때 관동군 헌병으로 첩보활동을 한 경력을 인정받아 그는 제1연대에 정보소대가 창설되자 소대장이 되었다. 조선경비대 사관학교 3기 졸업생 수는 2백 80명이었으며 노재현, 박희동, 최세인이 뒷날 대장까지 올랐다. # 서형래, [육사 1기와 17기 사이] {신동아} 1982년 12월호
1947년(32세) -- 5월 제2차미소공동위원회가 별 성과 없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김창룡은 어느 날 소련군 대좌(대령)와 중좌 운전사 3명이 1연대와 사관학교 일대를 사진 촬영해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정보대원 몇 명을 데리고 추격, 소련군 숙소에 도착하여 정문에서 밀고 당기며 다투고 있을 때 미 24군단 CIC 정보원들이 도착하여 같이 카메라를 압수하고 필름을 현상하였다. 미국 측은 이것을 증거로 소련 측에 항의하여 사진촬영에 참가했던 소련군 3명을 본국으로 추방시켰다. 이 사건으로 김창룡은 '첩보활동 제1호'의 수훈을 세웠다.
그 뒤 1947년부터 김창룡이 암살된 1956년 1월까지 10여 년 동안 일어났던 큼직큼직한 사건 뒤에는 많은 부분 그의 손길과 발자취가 닿아 있었다.
1948년(33세) -- 8월 15일 정부 수립과 함께 육군 대위로 승진한 김창룡은 8월 30일부터 제1연대 정보주임 장교이면서 육군 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였다. 여기에서 육본 정보국 제3과장 김안일 대위와 함께 사건 조사와 숙군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창룡이 큰 공을 세운 사건이 '인민해방군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당사자들은 조작된 사건이라고 증언함.
1950년(35세) -- 6.25가 일어났을 때 경남지구 특무대장직을 맡은 김창룡은 대령이 되었다. 9.28수복 후에는 경인지구 특무대장이 되었으며 부역자들을 가려내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기 시작하였다. '6.25'가 터졌을 때는 김창룡은 형무소로 달려가 안두희와 고희두 사건으로 수감되어 있던 자기 부하 도진희를 지프에 태워갔다. 그해 7월 안두희를 소위로 복직시켰으며 53년 대령으로 예편할 때까지만 아니라 그 뒤에도 계속 뒤를 돌보아 주었다.
1951년(36세) -- 이 합동수사본부는 곧 국회에서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만들어졌으며 많은 사건을 조작하여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규탄 받아 51년 5월 해체되었지만 김창룡은 육군특무부대장으로 영전되었다.
1953년(38세) -- 김창룡은 그 뒤에도 이승만의 신임을 얻고 정권 수호에 혁혁한 공을 세워 준장으로 진급하고,
1955년(40세) -- 소장으로 순탄한 승진의 길을 걸어갔다.
1956년(40세) -- 1월 30일 어둠이 채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김창룡이 자신의 집에서 1백여 미터 떨어진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21의 2 자혜병원 앞에서 '괴한' 2명에게 저격당하여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와 김창룡>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에 과거 남로당 사건에 연루된 것에 대해 잘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 70년 7월에 김종신씨에게 말하죠.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되는 분(이재복)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그분이 자꾸 청하길래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여순반란사건 때(48.10월), 박정희 소령은 반란군 진압차 광주에 갔다 왔으며, 11월 남로당 혐의로 체포됩니다. 그리고 위내용의 자술서를 쓰고, 당시 그 이재복과 같이 간 장소에서 본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작성해 제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좌익활동이라는 것에는 하나같이 명백한 증거가 없습니다. 활동은 커녕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도, 도장도 없고, 당적조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박사모에서 발췌>
<김창룡과 그의 묘갈(묘비글)>
1. 머리글 - 김구 암살을 김창룡이 지시했나?
"白凡 암살 金昌龍(육본정보국 방첩대장) 지시"
1992년 4월 13일 동아일보는 1면 머리기사 제목을 이렇게 뽑고 김구 암살범 안두희가 사건이후 43년 만에 입을 열어 "당시 김창룡 특무대장의 사주를 받아 범행했다"고 진술, 암살사건의 전모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고 보도했다.
다음날 한겨레신문과 한국일보도 1면 머리기사로 "백범 암살 김창룡 지시"라며 안두희의 증언을 크게 실었다. 며칠 동안 언론은 온통 이문제로 야단이었다. 일반인들의 관심도 대단히 컸다. 김구 암살 사건이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뜻한다.
안두희의 진짜 배후가 누구일까? 정말 김창룡이 뒤에서 김구를 암살하라고 지시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면서도 정작 김창룡이라는 이름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을 때 그가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1950년대 그 유명한 김창룡,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권력을 휘어잡고 이승만의 오른팔 노릇을 하면서 권력을 지탱시켜 나갔던 육군특무대장 김창룡.
1993년 2월 MBC의 [제3공화국]에서도 잠시 비췄듯이 상관인 참모총장도 마구 대할 수 없었던 인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김창룡을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숙군을 여러 차례 감행하여 '숙군의 마왕', 교활하기가 그지없다하여 '스네이크(뱀), 냄새 잘 맡고 한번 물면 잘 놓질 않으며 주인에게 충성스럽다하여 '진도개', 포악하기가 네로와 같다 해서 '폭군네로' 따위가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1950년대, 누구나 그와 마주쳤을 때 "당신 마음이 이상해요"하는 말을 들으면 가슴 졸이며 으스스 떨어야 했다고 한다. 그 한마디는 "당신 용공(容共)이지" 하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말이 말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숱한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그에게 희생되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남들도 스스로도 인정하는 '타공전선(打共戰線)의 제1인자'가 되었다. 김창룡은 또한 1950년대를 큼직하게 수놓은 '김창룡 암살사건'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러한 김창룡이 김구 암살 사건과는 과연 어떤 관련이 있을까? 또 안두희와는? 안두희의 진술이 큼직큼직하게 보도되면서 김창룡이 암살사건에 깊이 관련되었다는 주장에서부터 그는 배후 인물이 아니라 뒷수습을 담당한데 지나지 않았다는 견해까지 의견들이 가지가지였다.
안두희가 김구를 쏘아 암살할 즈음 김창룡의 직위는 어떠했으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의견이 서로들 엇갈린다. 안두희는 "당시 조선 호텔 앞 '대륙상사'로 위장된 특무대의 김창룡씨 사무실에서 김씨와 단둘이 만나 백범 암살지시를 받았다"면서 그때 김창룡이 특무대장이었다고 하였다. 동아일보는 김창룡을 육본 정보국 방첩대장으로 표기하였고, 통일문제연구소는 육군방첩대장이라고 하였다.
한겨레신문은 육군1연대 정보관으로 표기하면서 안두희를 조사한 특무대장 김안일씨 인터뷰를 실었다. 당시 김창룡의 직위와 계급이 무엇이었느냐는 물음에 김안일은 "김창룡은 대위로서 태릉에 주둔하고 있던 1연대의 정보참모였다. 당시 내가 특무대장이었다고 하나 특무대·방첩대 등은 일반인들이 부르는 호칭이고 정확하게는 육본 정보국 3과장이었다. 육본 정보국 3과가 이른바 특무대(SIS)였고 사무실은 조선호텔 맞은편에 대륙공사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이 대륙공사에 김창룡은 업무상 매일 드나들었다"고 하였다. 그때 김창룡이 특무대장이나 방첩대장이라는 직위에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김교식은 1982년에는 "김창룡은 숙군이 끝날 무렵인 1949년 6월 육군 본부 정보국 소속 방첩대(SIS)장으로 취임, 숙군 작업을 다시 계속하였다. 초대 방첩대장 김안일 소령의 후임으로 부임하게 된 김창룡은 그해 7월에 중령으로 진급"한 것으로 보았다. #김교식, [실록 김창룡] {월간조선} 1982년 10월호).
그런데 1992년 안두희 증언 이후 다시 "처음 배후로 지적한 김창룡은 당시 특무대장이나 방첩대장 같은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김창룡은 국방경비대 제1연대 정보참모로 국방부에 차출되어 공군 정보대 창설에 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김창룡의 계급은 대위이면서도 임시계급을 소령으로 달고 있었다. 당시 김창룡은 안두희를 만나 김구 주석 제거를 위한 세뇌를 시키고 다닐 형편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김창룡의 지위에 대한 견해를 바꾸고 있다 #김교식, [안두희 고백에 언론이 놀아나고 있다]{월간조선} 1992년 5월호).
김구가 암살될 즈음 김창룡의 소속과 계급은 육군 제1연대 정보장교로서 대위였다고 보는 것이 사실일 것 같다. 그러면서 임무를 빌미로 소령 계급장을 달고 다녔을 수 있으며, 김구 암살에도 직접 배후로 끼어들었다기보다는 일이 벌어진 뒤에 안두희를 돌본 것 아닌가 싶다.
김창룡은 안두희를 범행 당일 바로 특무대 영창으로 옮기게 한 뒤 술·담배·고기 따위를 주고 간이침대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하는 등 특별배려를 하였다. 또한 안두희가 종신 판결을 받은 뒤 15년으로 형을 줄이는데 직접 영향을 미쳤다.
1950년 '6.25'가 터졌을 때는 형무소로 달려가 안두희와 고희두 사건으로 수감되어 있던 자기 부하 도진희를 지프에 태워갔다. 그해 7월 안두희를 소위로 복직시켰으며 53년 대령으로 예편할 때까지만 아니라 그 뒤에도 계속 뒤를 돌보아 주었다. 이러한 일들이 자신의 자발적인 의사였는지,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누구의 뜻을 헤아려 스스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안두희를 비호해 준 것은 사실이다.
김구 암살을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다하더라도 김창룡은 40년대 후반이후 1950년대 상황, 특히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한 번 살펴 볼만한 인물이다. 김창룡에 대해 언급한 몇 가지 글을 토대로 짤막하게 그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보고, 한국사학의 대가였다고 하는 역사학자 이병도가 쓴 김창룡의 묘비문을 통하여 한 인간의 '역사'가 어떻게 치장되고 있는가를 보도록 한다.
2. 김창룡의 생애와 활동
김창룡은 묘비나 공식문서에는 1920년생으로 되어 있으나 스스로 남긴 기록에 따르면 1916년 7월 18일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 일산리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뒤에 그 때문에 고생깨나 한 박정희보다 1년 먼저 세상에 태어난 셈이다.
열 살이 될 때 4년제 덕성사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한 뒤 2년제 영흥공립농잠실습학교를 거쳐 가다꾸라(片倉) 제사(製絲)회사에 취직하였다. 2년 만에 이 회사를 나와 만철(滿鐵)소속 신경(新京, 현재의 장춘)역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여기서도 2년 동안 역원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뒤 일본인의 추천을 받아 일본헌병부대 군속으로 들어갔다. 3년 동안이나 고된 일과 강추위 견디며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부은 결과 1940년 초 관동군 소속 헌병보조원이 되었다. 신경에 있는 헌병교습소에서 교육을 받고 김창룡은 드디어 관동군 헌병 이등병이 되었다.
1941년에 소만(蘇滿)국경 부근에 파견되어 사복으로 갈아입고 중국과 소련공산당의 움직임을 살피는 첩보활동을 폈다. 1943년 김창룡은 북만주에서 중국공산당의 거물인 왕근례(王近禮)를 상대로 정보활동을 펴서 그를 체포하게 하였다.
관동군 헌병대는 왕근례를 이용하여 역공작을 펴 만소국경일대에서 9개 지하조직 50여명을 체포하였다. 이 '공로'로 김창룡은 관동군 오장(伍長;하사급/분대장)이 되었고, 다시 공장지대에 들어가 2년간 50여건이 넘는 비밀 조직을 적발하였다.
해방 뒤 고향으로 돌아온 김창룡은 친일 경력 때문에 숨어 지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게 두 차례나 체포되었으나 그때마다 탈출하였다고 한다.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이아니라 '독립군'이었다면 그 탈출은 감동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호송하는 기차가 칙칙 폭폭 연기를 뿜어대며 힘겹게 고개를 휘어 돌고 있을 때 기차에서 뛰어내려 죽을힘을 다해 달아나자 귓전을 때리는 소련군 기관총 소리, 1차 탈출에 성공.
두 번 째는 다시 붙잡혀 소련군 장교가 취조를 하려고 통역관을 기다리다가 그를 앞에 앉혀놓고 꼬박꼬박 졸고 있을 때 앉아있던 동그란 의자를 들어 머리를 내리치고 뛰어나와 도망쳐 2차 탈출에 성공. 그러나 이러한 자신의 말이 얼마나 타당한 지는 달리 확인되지 않는다.
사실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그 뒤 스스로의 '타공(打共)' 행위를 정당화하려 지어낸 것인지. 1946년 남으로 내려온 그는 할 일이 마땅치 않아 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갔다. 헌병 오장 출신이 2등병으로 졸병노릇을 하려니 일마다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일제 때 헌병 오장이 떴다하면 면장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마을길을 청소시킬 정도로 대접을 받았는데 말이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졸병 생활을 버리고 1947년 1월 조선경비대 사관학교에 3기생으로 들어갔다.
그때는 사관학교 한기의 훈련기간이 고작 3∼4개월 정도였다. 김창룡은 4월에 소위로 임관되어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일제 때 관동군 헌변으로 첩보활동을 한 경력을 인정받아 그는 제1연대에 정보소대가 창설되자 소대장이 되었다. 조선경비대 사관학교 3기 졸업생 수는 2백 80명이었으며 노재현, 박희동, 최세인이 뒷날 대장까지 올랐다. # 서형래, [육사 1기와 17기 사이] {신동아} 1982년 12월호
1947년 5월 제2차미소공동위원회가 별 성과 없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김창룡은 어느 날 소련군 대좌(대령)와 중좌 운전사 3명이 1연대와 사관학교 일대를 사진 촬영해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정보대원 몇 명을 데리고 추격, 소련군 숙소에 도착하여 정문에서 밀고 당기며 다투고 있을 때 미 24군단 CIC 정보원들이 도착하여 같이 카메라를 압수하고 필름을 현상하였다.
미국 측은 이것을 증거로 소련 측에 항의하여 사진촬영에 참가했던 소련군 3명을 본국으로 추방시켰다. 이 사건으로 김창룡은 '첩보활동 제1호'의 수훈을 세웠다.
그 뒤 1947년부터 김창룡이 암살된 1956년 1월까지 10여 년 동안 일어났던 큼직큼직한 사건 뒤에는 많은 부분 그의 손길과 발자취가 닿아 있었다. 김창룡이 피살된 뒤 당국에서 든 그의 업적만도 이렇다. #[金昌龍의 最後]{解放20年史(記錄篇)}(文學社), 1967
ㅇ 8·15 직후 제1연대 장교식당 독살사건 발각
ㅇ 초대군감사령관 이병주(李炳周)체포, 15연대장 최남근(崔楠根)중령체포를 비롯한 수차례의 숙군.
ㅇ 제1차 미소공위 소련대표 촬영사건 처리
ㅇ 남로당 군사부책 이재복(李在福)체포
ㅇ 남로당 조직부장 이중업(李重業)체포
ㅇ 남로당비서 김형육(金炯六)체포
ㅇ 간첩 김수임(金壽壬) 체포
ㅇ 김삼룡(金三龍) 이주하(李舟河) 체포
ㅇ 송호성(宋虎聲) 경비대총사령관이 좌익과 한 연락 폭로
ㅇ 남로당 군사부장 김영식(金永植)체포
ㅇ 남로당 잠복공작 완전분쇄
ㅇ 남로당원 승려사건
ㅇ 인민공화당 경남위원장 김동산(金東山)체포
ㅇ 걸인가장 유격대원의 탄약고 파괴사건
ㅇ 남로당 경상도책 안소주(安小柱)체포
ㅇ 밀매부로 가장한 여성유격대원 타진
ㅇ 괴뢰군 환영 인애회(仁愛會)사건 검거
ㅇ 인민재판소 반동분자 조사대원 검거사건
ㅇ 벽보사건
ㅇ 조방(朝紡)사건
이 밖에도 김창룡이 관련된 것으로 '인민해방군사건' 적발, 그의 부하 도진희(都晋熙)에 의한 동대문 민보단장 고희두(高羲斗) 고문치사 사건, 관(棺)사건, 부산 금정산 공비위장사건, 동해안 반란사건, 정국은(鄭國殷) 국제간첩사건, 국가원수암살미수사건, 원면사건 등 많은 사건 있었다.
조작되는 사건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과 함께 육군 대위로 승진한 김창룡은 8월 30일부터 제1연대 정보주임 장교이면서 육군 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였다.
여기에서 육본 정보국 제3과장 김안일 대위와 함께 사건 조사와 숙군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창룡이 큰 공을 세운 사건이 '인민해방군 사건'이었다.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49년 9월, 뒤에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 연대장 오동기(吳東起) 소령을 비롯한 서완석, 성시백, 최능진 등이 군내부에 세력을 길러 반란을 일으키려던 모의를 발각하였다는 것이다.
오동기는 중국군 출신으로서 화북 의용군에 가담하여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하였으며 체포될 때 나이가 50이었다. 그는 인민해방군 사건으로 군법회의에서 10년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뒤에 오동기는 인민해방군은 있지도 않았으며 관동군 헌병출신 김창룡과 일본군 출신 채병덕이 자신을 그 자리에서 몰아내려고 조작한 사건이라고 증언했다 한다.
6.25가 일어났을 때 경남지구 특무대장직을 맡은 김창룡은 대령이 되었다. 9.28수복 후에는 경인지구 특무대장이 되었으며 부역자들을 가려내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기 시작하였다.
이 합동수사본부는 곧 국회에서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만들어졌으며 많은 사건을 조작하여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규탄 받아 51년 5월 해체되었지만 김창룡은 육군특무부대장으로 영전되었다. 김창룡은 그 뒤에도 이승만의 신임을 얻고 정권 수호에 혁혁한 공을 세워 53년 준장, 55년 소장으로 순탄한 승진의 길을 걸어갔다.
이 즈음에 일어난 [관사건]은 많은 청년들이 상복차림으로 상여를 메고 대구시로 향하고 있는 것을 조사해보니 관속에 카빈소총 50여자루가 들어 있어 김창룡이 모두 잡아들였다는 것인데 조작극이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부산 금정산 공비위장사건'은 대구형무소에 갇혀있던 중형수들에게 큰일을 치르고 나면 석방해주겠다고 꼬여 부산 금정산으로 끌고 가 공비로 위장시키고 있다가 모조리 사살하면서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한 사건이었다.
1951년 서창선 대위 살해 사건으로 오래 동안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4.19직후 석방되어 나온 서민호 의원이 주장하였다. 이승만 정권이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키면서 계엄령 선포의 구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러한 공작을 김창룡이 꾸몄다고 한다.- 정국은 국제간첩사건 # 이임하, [자유당과 정국은 간첩단 사건] {함께보는 우리역사}(구로역사연구소) 1993.2 ; 정희상, [정국은 간첩조작 사건] {말} 1989년 9월호
김창룡과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정국은 국제간첩사건]이었다. 특무대장 김창룡이 1953년 8월 31일 정국은을 간첩으로 체포하고 발표한 주요 죄상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정국은은 8.15해방 후 언론자유를 존중하는 미군정과 대한민국의 정책을 틈타 남조선 노동당에서 파견한 간첩1호로서 언론계에서 간첩활동을 하던 그는 반민밀정혐의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영문을 알 수 없는 병보석으로 다시 언론계에 나타났다.
정국은은 서울 중구 명동에 있는 태양신문에 있으면서 취재를 빙자해 광범한 정보 수집을 해왔고 특히 국방부와 육,해군본부를 무상으로 출입하며 군고위층과 접촉해 군사원조상황 등을 탐지했다. 그뒤 태양신문사가 폐간되고 지하로 숨었던 정국은은 어느새 연합신문 주일 특파원의 신분으로 일본에 가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동경에 있던 유엔군 기자구락부에 소속되어 군사기밀을 탐지했고 4-5개월 뒤 정국은은 연합신문과 동양통신의 편집국장으로 등장한다. 더욱이 그는 자유당 양우정씨의 그늘에서 족청계 1급 참모로 등장, 위세를 떨쳤다. 이러한 죄목으로 정국은은 '간첩'으로 체포된 지 6개월 만인 54년 2월 19일 사형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 내부의 세력 다툼에서 비족청계계가 족청계를 제거하려고 확대했던 것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비족청계가 정국은이 해방정국에서 활동한 경력을 꼬투리 삼아 간첩으로 몰고 족청계를 거세하는 디딤돌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
1951년 임기를 반년 남겨놓은 이승만은 간접선거를 통해서는 자신이 당선될 수 없음을 알고 1951년 11월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한 헌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1952년 1월 찬성 19표 반대 143표라는 압도적인 표차 개정안이 부결되자 이승만은 1952년 5월 계엄령을 선포하고 7월에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부산정치 파동을 일으켜 이승만 장기집권에 공을 세운 세력이 이범석을 비롯한 족청(민족청년단)계 - 원외자유당계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범석, 양우정을 중심으로 하는 족청계가 자유당 기간 조직을 장악해 들어가면서 세가 급속히 확대되어 이승만이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 틈새를 타고 비족청계가 반격을 가하는 과정에서 정국은 간첩사건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족청계와 비족청계의 세력 다툼에는 군부내의 권력자들로서 이승만의 왼팔 오른팔 노릇을 하며 경쟁관계에 있던 원용덕과 김창룡이 계열을 달리하여 개입하고 있었다. 헌병 대장이었던 원용덕(당시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은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법개정안에 반대했던 야당 국회의원 40여명이 탄 버스를 공병대 포크레인으로 끌고 가 잡아 가두고 국제공산당으로 몰아붙이는 등 부산 정치파동에서 주역을 담당하면서 이승만의 재집권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에 비해 비족청계 쪽이었던 김창룡은 족청계가 기세를 높여가자 이 정국은 사건을 만들어 족청계를 제거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정국은 간첩사건을 담당했던 당시의 군재판부 법무관 태윤기씨는 사건 뒤에 숨어있던 정치세력간의 알력을 이렇게 말했다. 정국은 사건은 족청계의 원용덕(당시 헌병사령관) 양우정(당시 국회의원)과 비족청계의 백두진(당시 국무총리) 김창룡(당시 특무대장) 간의 싸움이었소. 말하자면 백두진 줄기에서 간첩사건을 만들어 내 족청계를 거세하려는 의도가 있었지요. 서로 이 박사의 총애를 받고자 하는 싸움 속에 정국은 사건이 이용된 것인데 이것은 그 전의 환금장유(丸金醬油)사건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환금장유사건이란 마산에 있는 좌익계 환금장에서 백두진에게 정치자금을 보냈다고 족청계 원용덕이 이박사에게 일러바쳐 수사가 지시된 사건이었지요. 그렇게 되자 백두진 쪽에서 이승만에게 족청계는 간첩 정국은을 데리고 있다는 식으로 맞받아 친 것이오.
그런 사건이라 내가 보기에도 정국은을 간첩으로 몰아 죽이기까지 한 것은 너무 심함 정치적 음모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여 정국은 간첩사건은 부산 정치파동 때 공이 큰 족청계열의 그 방대한 세력이 무너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승만의 족청 거세는 실제로 이범석을 부통령에서 낙선케 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이범석의 외유(52.6.5), 족청계의 거물인 양우정의 오른팔이었고 연합신문의 편집국장이던 정국은을 간첩혐의로 체포(53.8.31), 족청계 3장관인 이재형 상공장관, 진헌식 내무장관, 신중묵 농림장관의 파면(53.9.10), 이승만의 족청계 거세성명, 이범석의 귀국과 때를 맞춘 자유당 족청계 8명의 제명 등을 통하여 차례차례 진행되었다.
김창룡은 제2인자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양우정까지 구속하고 군재에 회부해서 1954년 12월 11일 7년형을 선고받게 했다. 이렇게 하여 부산 정치 파동의 주역으로 세를 올리던 족청계는 정치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나게 되고 그 자리를 이승만 정권의 새로운 충복으로 등장하는 이기붕 일파가 채워갔으며 그에 따라 김창룡의 위치도 높아만 갔다.
동해안 반란사건
[동해안 반란사건]은 "동해안 속초에 있는 1군단(군단장 이형근 중장)에 이대통령이 시찰을 갔을 때 1군단 인사참모 김화산 대령이 이대통령을 쏘아 암살하고 반란을 일으켜 군대 1천명을 이끌고 부산에 가면 부산에서 육군 본부 정보국장 김종평 중장이 이군대를 직접 지휘, 임시 경무대를 급습하고 정부 요인을 처단한 다음 조봉암 국회부의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며 김화산 대령은 방송국을 점령하고 이형근·이종찬 중장은 사태 수습을 위해 민심 선무를 담당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박정우(당시 동해안 수복지구 수석 군정관)는 이 사건은 모두 김창룡 특무대장의 조작이었다고 군법회의에서 증언했다. 또 반란음모로 3년형을 선고 받은 김종평 중장은 이 사건을 원용덕과 김창룡이 충성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김창룡이 조작한 사건이라고 하였다.
1952년 발생한 부산정치파동 때 원용덕이 크게 공을 세운데 비해 경쟁관계에 있던 김창룡은 정보국장이던 김종평이 부산에 가지 못하게 하여 공을 놓쳤다고 생각하여 감정을 품고 김종평이 경무대를 습격하려 한다고 [동해안 반란사건]을 만들어 올가미를 씌웠다는 것이다.
김창룡과 원용덕, 비족청계와 족청계 사이의 충성경쟁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정치 행태의 한 산물이다.
국가원수 암살음모 사건
1955년 10월 14일 공보실에서는 조소앙의 비밀지령에 의한 국가원수 암살흉계 전모를 발표하고 주모자 명단과 그 내용, 그리고 대규모의 요인 암살명단까지 발표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연루된 사람들은 나재하(羅在夏), 김병호(金柄豪), 민영수(閔泳壽), 김재호(金載浩), 김익중(金翊重), 이범륜(李範倫), 유성연(劉成淵), 김동혁(金東赫), 김동훈(金東勳) 등이 었다. 이들은 1955년 11월 1일 육군본부 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이적죄, 내란목적의 살인예비, 전시 도망, 무허가 무기휴대, 폭발물 사용 미수죄 등에 대한 재판을 받았다.
이들중 이범륜과 김동훈에게는 사형이 선고되고 나머지 피고인은 대부분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이 하수인 이종태를 시켜서 1955년 10월 3일 중앙청에서 개최될 개천절 식장에 이승만 대통령이 임석하면 수류탄을 던져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김구의 한국독립당이나 조소앙의 사회당 창당 과정에 관련이 있던 사람들이 많았고, 자연 이승만 독재체제에 대한 불만을 컸다.
어느 날 이들 앞에 '의열청년' 이종태가 나타나 이승만을 소리 높여 성토하자 '노투사'들은 거기에 동감하였다. 자주 만나면서 이종태는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하려면 이승만을 제거하는 길밖에 없다. 자기가 이승만을 제거할테니 모든 일을 자기에게 맡기라고 하여 그의 주장을 옳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수류탄을 넣고 식장에 들어갔다는 이종태는 피고로 등장하지 않았다. 수사기관에 체포된 일도 없고 피의자 심문조서를 작성한 일도, 법정에 증인으로 나타난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피의자들이 김창룡 방에서 무릎을 꿇고 맞고 있을 때 사건 직전에 없어진 이종태가 군복을 입고 그 방에 들려 마주치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이 함정수사에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김창룡은 이승만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세력을 제거하려고 자기가 만주에서 관동군 헌병으로 중국 공산당 비밀조직을 적발하고 와해시키던 수법을 부하를 시켜 복습케 했던 것이다.
원면사건과 김창룡 암살
김창룡은 이러한 활동으로 최고 권력자의 총애는 받았으나 많은 적들을 만들어 나가게 되었다. 김창룡은 군대내 후생차량 단속과 원면사건으로 군의 사기를 떨어뜨린다고 장성들에게 집중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었다. 후생차량 단속은 그때 여러 부대가 나무를 마구 베어 군차량에 싣고 도시에 들어와 처분하던 양상을 없애버리라는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특무부대가 단속에 나선 것을 말한다.
원면 사건은 국방부가 정부에 요청한 3군 장병의 월동용 군수물자로서 50만 달러에 해당하는 원면을 받고 그것을 시장에 팔아 10억 환 이상의 이익금을 선거자금으로 쓰도록 자유당 고위층에 바쳤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유당 비 주류파 하태환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폭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국방부 쪽에서는 많은 문관들의 월급을 예산에서 할당받지 못하자 궁여지책으로 싸게 들어온 원면을 비싸게 팔아서 거기서 얻어지는 이익금을 그들의 인건비로 쓰려했다고 한다. 김창룡은 원면사건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막으라는 이기붕의 당부가 있었음에도 사건을 계속 들추었다. 이를 계기로 국방장관 손원일과 참모총장 정일권까지 밀어낼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1956년 1월 30일 어둠이 채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이번에는 김창룡이 자신의 집에서 1백여 미터 떨어진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21의 2 자혜병원 앞에서 '괴한' 2명에게 저격당하여 목숨을 잃었다.
그가 지니고 있던 원면 사건 수사 기록이 든 봉투가 무릎에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고 있던 당대 실력자가 극적으로 죽음을 당하자 세상은 발칵 뒤집힌 듯했다. 그러나 범인은 금방 잡히지 않았다.
당국은 한달이 가까워 오는 그해 2월 23일 '김창룡 암살사건'의 관련자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주범 : 허태영 대령(37) 전서울지구병사구사령관·특무대 출신, 공범 : 이진용 대령(37) 육군본부 정병감·특무대 출신, 안정수 헌병소령(55) 12 CID대장, 허병익 중위(27) 허태영의 동생, 이유회 일등중사 허태영의 운전수 범행당시 운전, 하수인 : 송용고(29) 전문관·전특무대원, 신초식(31) 전문관·전특무대원.
다른 죽음이기는 하지만 김구의 배후가 어느 선까지인가가 물증을 기준으로 한다면 여전히 의문으로 남듯이 김창룡 암살 사건도 허태영 대령 뒤에는 누가 없었는가가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이 역사를 짤막하게 쓴다면 어떻게 쓰여 질 수 있을까? 3. 맺는 글 - 이병도가 쓴 김창룡이 역사 서울의 관악산 앞산인 삼성산 삼막사를 거쳐 안양유원지쪽으로 내려가거나 안양유원지 입구 매표소를 지나 왼쪽으로 조금 꺽어 올라가다 보면 안양사라는 절과 만난다. 안양사 가까이에 둘레를 철조망으로 빙 둘러 치고 입구에는 철대문을 달아놓은 커다란 무덤이 있다.
무덤이 철조망에 갖힌 꼴이다. 무슨 사연이 그리 많길래 철조망에 갖힌 무덤일까. 철조망만 아니라면 봉건시대 세도꽤나 부리며 당당했던 고관대작의 무덤과 다를 바 없다. 그 무덤과 옆에 세워진 묘비에서 우리는 현대판 고관대작과 고대사 연구가가 쓴 짤막하지만 함축적인 50년대의 한 '현대사'를 만나게 된다. 환갑 즈음되었을 때 문학박사 이병도가 쓴 역사이다. 내용은 이렇다.
고 김창룡 중장 묘갈(묘비 글)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 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대장 김창룡 중장은 4289년 1월 30일 출근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아니 놀래고 슲어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가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함이 이구동성의 외침이었다. 그는 본시 영흥출생으로 80년에 육사를 마치고 그후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과장에 취임하여 이래 누차 숙군을 단행하여 군의 육성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특히 동란 중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분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2만5천명 전시 방첩의 특수임무를 달성하였다. 84년 육군특무부대장에 부임하여서는 더욱 헌신적 노력과 탁월한 지휘로써 국가 및 군사안전보장에 기여하였다. 그 중요한 적발만으로도 85년 대통령 암살음모의 김시현 사건 85년 남도부등의 대남유격대 사건 88년 대통령 암살 음모자 갬재호 일당을 미연에 일망타진한 그것이다. 그는 이렇듯 나라에 유공하였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그의 생년은 단기4253년 11월 23일 향년은 37로서 순직과 동시에 육군중장에 승진되었다.
단기 4289년 2월 3일 입학박사 이병도 지음
육군참모총장 육군대장 정일권 역사가 어떻게 미화되고 왜곡되는가를 참으로 잘 보여주는 짤막한 역사이다. 김창룡의 묘와 비문을 보고 내려오면서 문득 또 다른 역사 사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김창룡 같은 자가 오른팔 노릇을 하면서 지탱해 나갔던 이승만 정권이 '4.19'에 의해 무너지고 들어선 허정 과도 정권. 그때 문교부 장관이 이병도였다.
그는 전국 교직원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던 1960년 5월과 6월 교원노조를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김창룡으로 표상되는 우리의 근현대사와 그것을 기록한 '역사'는 아직도 지배의 역사로 살아있다. 한편 검은색 오석 묘비 속에 차디차게 굳어있는 근 2만5천의 죽음은 우리에게 '민중의 세상', '해방의 세상' 그리고 '민족의 역사' '민중의 역사'를 어서 이루라고 갈망하고 있지나 않을까. 그럼으로써 어서 빨리 그 비석 속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참고로 아래사주는 출생일자를 양력으로 본 것이며 출생시는 도무사가 추정한 것임.
음력이 맞는 듯함.
양 력: 1916년 7월 18일 김창룡
음/평: 1916년 6월 19일 남자
시 일 월 년
甲 丙 乙 丙
午 辰 未 辰
庚 己 戊 丁 丙 대운: 순행
子 亥 戌 酉 申
56 46 36 26 16 6.1
대운 시작: 6세 1월 7일
사망일시 : 1956년(41세) 1월 30일 암살당함. (경자대운 을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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