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Ito Hirobumi]
양력 : 1841년 10월 16일 02시
음력 : 1841년 9월 2일 02시
시 일 월 년
癸 癸 戊 辛
丑 丑 戌 丑
73 63 53 43 33 23 13 3
庚 辛 壬 癸 甲 乙 丙 丁
寅 卯 辰 巳 午 未 申 酉
사망시기 : 69세, 1909년 10월 26일 피살 당함. 신묘대운-기유년-갑술월-기미일에 사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Ito Hirobumi]
1841. 10. 14 일본 스오 구니[周防國] ~ 1909. 10. 26 중국 만주 하얼빈[哈爾濱].
본명 하야시 도시스케[林利助]이다. 야마구치현[山口縣]출생으로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하급무사의 집안인 이토가[伊藤家]에 양자로 들어갔다. 이토는 1603년부터 일본을 다스려온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몰락과 일본 내의 서양 세력의 등장으로 빚어진 혼란스런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1863년 -- 영국에 유학.
1864년 -- 귀국한후 도쿠가와 바쿠후를 전복하는데 투신. 그는 도쿠가와 바쿠후를 전복시키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메이지 유신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에서 미미한 역할만을 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같은 인물과 알게 되었는데 기도는 메이지 시대 초기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이 시기 이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과 같은 인물이었다.
1868년 -- 메이지 유신. 유신정부의 국외사무국 판사, 효고현 지사 등 역임.
1870년 -- 미국 파견 사절단 일원이 됨. 미국에 가 화폐공채제도를 고찰.
1871년 --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1873년까지 해외(미국과 유럽)에서 과세(課稅)· 예산제도·조약개정 등의 다양한 분야를 연구할 수 있었음.
1878년 -- 내무상으로 승진함. 정치가로서 이토의 생애는 1878년 당시 정부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쿠보가 암살되면서 결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토는 오쿠보의 뒤를 이어 내무상으로 승진했으며 이로써 그와 마찬가지로 야심있고 재능있는 정치가인 오쿠마 시게노부[大重信]와 대립하게 되었다.
1881년 -- 이토는 잇따른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오쿠마와 그의 지지자들을 정부에서 축출했으며 정부를 설득하여 헌법을 제정하게 했다.
1882년 -- 당시 메이지 정부 내에서 가장 비중이 있는 인물이었던 이토를 비롯한 다른 관료들은 유럽, 특히 독일에서 거의 1년 6개월 동안(1883년까지) 당대의 유명한 헌법학자들에게서 헌법을 공부했다.
1884년 -- 후작작위를 받음.
1885년 -- 내각제를 창설하고 12월 22일 초대 총리로 임명됨,
1888년 -- 4월 30일 총리 퇴임. 추밀원(樞密院) 의장에 취임
1889년 -- 천황은 헌법 제정을 선포했고
1890년 -- 의회가 수립되었다. 국회의 개설과 동시에 귀족원 의장이 되었다.
1892년 -- 9월 8일 제 5대 총리에 임명됨,
1894년 -- 조선 상황- (1월) 전봉준의 고부민란 발생. (2월) 김옥균 상해에서 암살됨. (3월) 백산에서 동학농민군 봉기. (5월) 전주화약. (6월) 청일전쟁. 일본군 경복궁 점령. (8월) 甲午義兵 봉기 시작됨. (9월) 동학농민군 2차봉기. (10.22∼11.12) 동학농민군 공주 우금치에서 대패.
1895년 -- 조선상황- (3월) 전봉준 처형. (윤5) 전국에 콜레라 만연. 수천 명 사망. (8월) 乙未事變, 민비 사망. (11.15) 단발령 공포.
1896년 -- 9월 18일 총리 퇴임. 조선상황- (1월) 전국 각지에서 乙未義兵 일어남. (2.11) 고종, 俄館播遷. (2.18) 내부대신, 단발령 취소. (4월) {독립신문} 창간. (7월) 서재필 등 독립협회 조직. (9월) 전국의 의병 거의 해산. 유인석 부대는 서간도로 들어감.
1898년 -- 1월 12일 제 7대 총리에 임명됨, 같은 해 6월 30일에 퇴임함.
1900년 -- 10월 10일 제 10대 총리에 임명됨,
1901년 -- 6월 2일 퇴임함.
1904년 -- 조선상황- (2월) 러일전쟁 발발. 韓日議定書 조인. 의병 재봉기. 일진회 조직.
1905년 -- 초대 조선 총감에 임명됨. 조선상황- (5월) 경부철도 개통식. (11.17) 을사5조약 강제체결. (11.20) 장지연,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발표. (11.30) 민영환 자결. 의병봉기 전국으로 확대. (12월) 손병희,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1907년 -- 최고위 작위인 공작(公爵)을 수여받았음. 조선상황- (4월) 新民會 조직. 이준·이상설, 고종황제의 밀서를 휴대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차 출국. (7월) 군대 해산,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의병운동 일어남(丁未義兵). (8월) 광무황제(고종) 퇴위, 순종 즉위.
1909년 -- 6월 14일 조선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의장을 맡음.
1909년 -- 10월 26일 러시아의 재정대신 코크쵸브와 원동의 세력범위를 획분하는 것을 상담하기 위해 중국동북에 오던 중 할빈역에서 애국지사 안중근에 의해 피살됨.
일본의 원로 정치가(겐로[元老])이자 1890년 전후로 초대총리 포함하여 총리 4번, 초대 조선 총감 1번 역임.
제1대 총리 기간 1885년12월 22일- 1888년4월 30일
제5대 총리 기간 1892년 9월 8일- 1896년9월 18일
제7대 총리 기간 1898년1월 12일- 1898년6월 30일
제10대 총리 기간 1900년10월 10일- 1901년6월 2일
제1대 조선총감 기간 1905년-1909년
이토 히로부미 본명은 도시스케[利助]. 현대 일본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로서, 메이지 헌법(1889)의 초안을 마련하고 양원제 의회(1890)를 수립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1884년 후작작위를 받은 데 이어 1907년 공작이 되었다.
[초기활동]
본명 하야시 도시스케[林利助]이다. 야마구치현[山口縣]출생으로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하급무사의 집안인 이토가[伊藤家]에 양자로 들어갔다. 이토는 1603년부터 일본을 다스려온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몰락과 일본 내의 서양 세력의 등장으로 빚어진 혼란스런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도쿠가와 바쿠후를 전복시키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메이지 유신(1868)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에서 미미한 역할만을 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같은 인물과 알게 되었는데 기도는 메이지 시대 초기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이 시기 이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과 같은 인물이었다.
메이지 유신 전에도 이토는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조슈[長州]의 지도자들에게 발탁되어 서양의 해군학을 공부하러 영국으로 갔다.
그는 기도뿐만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초기 정계 거물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 파견 사절단(1870)과 이와쿠라[岩倉] 사절단(1871~73)의 일원이 되어 해외에서 과세(課稅)· 예산제도·조약개정 등의 다양한 분야를 연구할 수 있었다.
[권력에의 부상]
정치가로서 이토의 생애는 1878년 당시 정부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쿠보가 암살되면서 결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토는 오쿠보의 뒤를 이어 내무상으로 승진했으며 이로써 그와 마찬가지로 야심있고 재능있는 정치가인 오쿠마 시게노부[大重信]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토는 잇따른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1881년 오쿠마와 그의 지지자들을 정부에서 축출했으며 정부를 설득하여 헌법을 제정하게 했다. 1889년 천황은 헌법 제정을 선포했고 1890년 의회가 수립되었다.
입헌정부의 수립에 대한 준비작업은 매우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메이지 정부 내에서 가장 비중이 있는 인물이었던 이토를 비롯한 다른 관료들은 유럽, 특히 독일에서 거의 1년 6개월 동안(1882~83) 당대의 유명한 헌법학자들에게서 헌법을 공부했다.
이토의 가장 위대한 작품인 메이지 헌법은 민권과 의회의 권한 등에 여러가지 제한을 두었기 때문에 독재정치를 영구화시켰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당시 메이지 지도자들이 대부분 무사 출신이었고 그들이 직면하고 있었던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감안하면 기본권 보장과 의회 수립을 명문화한 이 전례가 없는 조치는 진보적·계몽적인 처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토나 다른 메이지 지도자들이 독재정치로 복귀할 구실로 대내외적인 어려운 문제들을 내세운 적이 없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토의 영향력은 1890년대를 통하여 계속되었다. 1890년대 중반에 그는 총리(85년 12월 22일)로서 2가지 중대한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첫째는 영국과 조약(1894)을 맺어 1899년까지 일본 내의 영국인에 대한 치외법권을 철폐키로 한 것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 내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은 1899년 이후 일본법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이 조약이 선례가 되어 일본은 다른 서구열강과도 동일한 조약을 맺었다.
둘째 성과는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거둔 승리였다. 이 2가지 성과는 일본이 비(非)서구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고 동아시아 문제에 있어서 좀더 비중있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토는 국내 정치에 있어서는 그다지 잘 해나가지 못했다. 그는 정당 정치인들이 공평하게 국가의 복지와 운명을 위해 일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겐로들도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메이지 헌법상에 보장된 권리에 따라 정당들은 국회 내에서 정부 예산안을 방해할 수 있었다.
이토는 참을성 있게 특유의 융통성을 발휘하여 정당들과 타협을 계속해나갔다. 1900년 전까지는 어떠한 내각도 정당의 묵시적 동의 없이 성립되지 못했다. 처음부터 정당들은 정부와 협조해왔었고 그에 대한 대가로 각료직과 정당 발전에 유리한 법률조항의 제정을 보상받았다.
이토는 이러한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를 떠나 반(反)정부 정당이었던 헌정당(憲政黨)에 기반을 둔 정우회(政友會)를 구성했다. 정우회는 중의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다수당이 되었으며, 이제 이토는 정부 정책들을 순조롭게 진행시킬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토는 귀족원의 방해책동을 예상하지 못했는데 당시 귀족원의 보수적인 의원들은 이토가 정당에 관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얄궂게도 애당초 더 무책임해 보이는 중의원을 견제하기 위해 귀족원을 발족시킨 장본인은 바로 이토 자신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토는 자신의 선거구를 관리해야 하는 정당인과 상대하는 것이 같은 배경과 야망을 가진 소수의 겐로들과 함께 일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불쾌한 일이라는 사실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으며 1903년에 정우회 총재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이토는 겐로직을 이탈했던 대가를 치러야만 했는데, 바로 뒤에 근대 일본군의 창설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강력한 겐로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토의 업적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는 고위 관료와 정당인 사이의 협조관계를 바람직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이 두 그룹이 끊임없이 비생산적인 양극화 세력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더욱이 다른 겐로들이 연이어 메이지 헌법에 충실하게 됨으로써 정당의 성장이 불가피해졌다.
[암살]
이토가 한국에서 통감(統監)으로 보낸 시기는 실패로 끝났다. 그의 온건하고 동정적인 접근방식은 한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으며 일본 내의 다른 지도자들이 주장했던 한국합병 움직임을 막지도 못했다.
결국 1909년 10월 북부 중국의 하얼빈 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안중근(安重根)에게 암살당했는데 자신이 정치적 이유로 암살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바보 같은 놈이군!"이었다.
이 말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공평무사한 대한정책(對韓政策)을 추진해왔고 앞으로도 추진할 유일한 일본 지도자인 자신을 암살한다는 뜻이었던 것 같다.
이토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이토가 일본 근대화에 기여한 공로는 의심할 바 없지만 그는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으뜸가는 인물은 아니다.
일본인들은 낭만적인 영웅들, 특히 위대한 군사적 대의를 위해 싸우다 실패한 사람들을 더 좋아한다. 또한 사생활이 문란했기 때문에, 윤리 교과서에 일본 젊은이의 본보기로 실리지 못했다.
그는 허장성세로도 유명한데, "술이 취하면 나는 미녀의 무릎을 베고 쉰다. 술이 깨면 나는 권력의 고삐를 힘차게 잡아 쥔다"고 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으며 그는 오쿠보·오쿠마·야마가타처럼 강력한 의지를 소유한 정치가도 아니었다.
그는 타협자의 역할, 조화로운 해결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그가 이룬 불후의 업적은 실행가능한 헌법체계를 탄생시킨 것으로서, 이로 인해 일본인들은 질서정연하고 점진적이며 평화로운 정치변혁을 꾀할 수 있었고 국민들의 정치참여라는 중요한 과정을 통해 정치의 폭을 더 넓혀나갈 수 있었다.
G. Akita 글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이등박문)…한국인으로서는 쉽게 관심갖기 어려운 인물. 초등학생도 그 이름은 안다. 안중근의사의 총탄에 숨진 우리 민족의 원흉(元兇). 그러나 그가 젊어서 테러조직에 가담해 영국공사관을 습격 방화하고 심지어 노선이 다른 학자의 아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테러리스트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책은 국내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를 파헤치고 있다. 그동안 일본학계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하면서 ‘신화’도 벗겨낸다.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일본은 서구문명의 충격 앞에서 진로모색에 한창이었다.
기득권 유지세력이 있는가 하면 근대화 혁명을 모의하는 세력까지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곳곳에서 일종의 학파들이 형성돼 미래를 도모하고 있었고 이토는 요시다 쇼인의 문하에 들어간다. 여기서 그는 장차 혁명동지들을 대거 만났다. 짧지만 영국유학도 갈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 때 그는 공신(功臣)이 됐다. 그후 그의 신분적 한계는 더 이상 그의 출세가도를 가로막지 못했다. 구미 여러나라를 돌며 근대국가의 기초를 공부했고 돌아와서 ‘일본국’의 설계자로 떠오른다.
그는 일본헌법의 아버지다. 나라의 방향을 기획했고 그같은 내용을 담아낼 그릇으로서의 헌법설계를 위해 그는 유럽의 석학들을 두루 만나고 배웠다. 공식적인 학교교육을 받은 바 없는 그가 이런 경지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는 쉽게 상상이 간다.
44세때 그는 백작(伯爵)의 작위를 받았다. 45세때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이어 50세때는 초대 귀족원의장에 오른다. 근대일본의 아버지라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다. 무려 네 차례에 걸쳐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하면서 일본의 패권주의를 진두지휘했다. 여기서 대한제국도 희생된다. 1905년 65세때 한국을 방문해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초대 한국통감에 오른다. 조선 식민화의 선봉이었다. 이같은 공이 인정돼 67세때 최고위 작위인 공작(公爵)을 수여받았다.
1909년 6월14일 한국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의장을 맡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여행에 나섰다가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총격을 받았다. 안중근의사가 쏜 총이었다. 저자는 전기적인 측면 이외에 한국인의 입장에서 관심이 가는 조선침략 과정에서 이토의 역할도 상세하게 해부했다
안중근의사 일본관료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할빈에서 암살
1909년10월26일 일본관료정치가 이토 히로부미 할빈에서 암살 당함.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조슈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나 하급무사에 입양되어 성장. 1863년 영국에 유학. 1864년 귀국한후 도쿠가와 바쿠후를 전복하는데 투신. 1868년 유신정부의 국외사무국 판사, 효고현 지사 등 직을 담임. 1870년 미국에 가 화폐공채제도를 고찰.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 일원으로 미국과 유럽을 방문. 1878년 내무상으로 승진하고 1881년 메이지14년 정변을 발동하여 최대 실권의 인물로 됨. 1882-1883년사이 유럽의 입헌제도를 고찰하고 독일을 모방하여 근대 천황제를 구축. 1885년 내각제를 창설하고 1900년에 선후로 4차나 총리대신 겸 귀족원, 수미원 의장 등 직을 담임했고 정우회를 조직하고 총재를 담임. 대외로 전쟁정책을 실시하고 중국을 침략하고 러시아와 원동의 패권을 쟁탈. 1906년 한국 통감으로 부임되면서 조선에 대한 병탄을 가속화. 1907년 공작으로 책봉됨. 1909년와 러시아의 재정대신 코크쵸브와 원동의 세력범위를 획분하는 것을 상담하기 위해 중국동북에 오던 중 할빈역에서 애국지사 안중근에 의해 피살.
본명 하야시 도시스케[林利助]이다. 야마구치현[山口縣]출생으로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하급무사의 집안인 이토가[伊藤家]에 양자로 들어갔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수학,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에 참가하였다. 메이지[明治] 신정부 성립 후 정계에 투신하여, 외국사무국 판사 등을 역임하고, 1870년에는 화폐제도 ·은행제도 조사를 위하여 미국에 파견되었다. 1881년 국회개설문제로 정부 내에 대립이 생기자 기성세력을 몰아내고 메이지정권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1885년 초대 내각 총리대신이 되고, 1888년 추밀원(樞密院) 의장에 취임하였으며, 국회의 개설과 동시에 귀족원 의장이 되었다. 러 ·일전쟁 후인 1905년 조선에 통감부(統監部)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으로 부임, 한국 병탄(倂呑)의 기초공작을 수행하였다. 그는 개성과 우리나라의 무덤에서 고려청자를 대대적으로 도굴하여 일본으로 가져가게 하였다.
1909년 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이 되어 만주시찰을 겸하여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회담차 중국 하얼빈에 도착하였는데,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대한독립단 소속의 안중근(安重根)에게 총탄을 맞고 죽었다. 현대 일본의 기초를 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며, 특히 독일헌법의 기초에 의해 만들어진 메이지헌법의 초안작성(1889)과 양원제(兩院制) 의회의 확립(1890)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토가 죽은 뒤에 재산이 너무 없어서 천황이 유가족에게 3백만원인가 주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완용은 재산이 얼마나 많았는지 지금도 후손들이 재산을 찾고 있다.
출처 : 사주명리 - cafe.daum.net/sajusaj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