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墓)
인간이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으며 무덤에 들어갑니다.
그 무덤에 묻히는 과정을 묘라 합니다.
무덤 속에는 시체가 있을 뿐 인생은 없습니다.
묘는 무덤이 아니고 무덤 속에 살아있는 인생입니다.
무덤 안에는 음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음식입니다.
그 음식이 떨어지면 인간은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사치와 낭비를 즐깁니다.
하지만 무덤 속의 인생은 사치나 낭비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밥알 하나를 애지중지하면서 아끼고 절약합니다.
한 숟가락의 밥은 수백 그릇의 밥보다도 소중합니다.
이제 할 수 있고 해야할 일은 밥그릇을 아끼고 또 아끼는 것입니다.
밥그릇이 비워지면 인생은 살아 남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영원한 죽음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일지나 월지에 묘를 타고난 사람은 선천적으로 검소하고 절약하며 모으는 것을 즐깁니다.
어려서 부모나 어른들로부터 용돈을 얻으면 쓰지 않고 꼬박꼬박 저축합니다.
자라나서 한창 멋을 부릴 시절에도 사치나 허영과 낭비를 모릅니다.
지나치리만큼 인색하고 소금보다도 짜며 철저한 구두쇠입니다.
유행이나 멋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욕심이 대단합니다.
사랑보다는 돈을 즐기고 명성보다는 부를 탐합니다.
묘는 흙의 무덤이듯이 십이운성의 묘는 하나같이 土인 辰戌丑未에 갈무리되고 있습니다.
여성이 辰戌이나 丑未가 있으면 팔자가 드세고 과부가 되기 쉽다고 합니다.
여자가 과부가 된다는 것은 남편이 일찍 죽는다는 뜻입니다.
수 천년동안 점술계를 석권한 사주에서 절대적이며 치명적입니다.
이 때문에 다된 혼사가 깨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남편을 잡아먹는 과부팔자의 며느리라는 데야 어느 누가 선뜻 호응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는 묘의 진리와는 판이한 오판이요 미신입니다.
묘는 사람의 무덤이 아니고 돈 뭉치입니다.
돈 뭉치를 꽉 움켜쥐고 죽자살자 알뜰하게 지키는 형국입니다.
그에겐 돈이 인생의 기본이요 전부입니다.
돈은 경제입니다.
묘는 경제의 별입니다.
묘를 가진 인생은 선천적으로 물질적이고 경제적입니다.
돈을 벌고 모으는 것은 기쁘고 즐겁지만 쓰고 소비하는 것은 질색입니다.
결혼을 하면 애정이 으뜸입니다.
신혼생활 때는 마음껏 사치하고 멋을 내며 사랑을 즐기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묘의 신부는 다릅니다.
애정보다는 돈과 경제가 제일입니다.
사치하고 멋을 내기 위해서 돈을 낭비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신혼여행도 아주 검소하고 절약해야 합니다.
돈에 치우치다보니 애정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 잘 살자는 게 아닙니다.
돈을 모아서 부부가 부유하게 잘 살자는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남녀가 평등하게 일하고 생산합니다.
직업여성으로서는 천부적인 적성입니다.
여성이 경제적이고 애정보다 돈을 즐긴다고 해서 허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오히려 바람직한 여성상(女性像)이 아니겠습니까?
여성이 경제적이고 직업적이라는 묘의 풀이와 여성이 남편을 깔아뭉개고 여장부 노릇을 하는 과부 팔자라는 묘의 풀이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입니다.
묘는 돈을 갈무리하는 뭉치요, 금고로서 돈과 금고를 다루는 직업에는 안성마춤입니다.
은행원이나 경리담당 또는 금융업에는 천부적인 적성입니다.
돈을 신주처럼 모시고 지킴으로써 돈을 아끼고 갈무리하는 데에는 가장 적합한 인물입니다.
한푼도 천금처럼 아끼고 철저히 검소하고 절약하며 모으고 갈무리하는 묘는 직업여성의 전형적인 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멋이라면 환장을 하고 돈을 물쓰듯하며 사치와 낭비와 허영을 탐하고 즐기는 목욕과는 대조적입니다.
묘의 운성을 타고난 사람은 어려서부터 검소하고 절약하고 이끼고 알뜰하고 철저히 타산적이고 경제적입니다.
목욕은 천방지축 아까운 줄을 모르고 닥치는 대로 씁니다.
묘는 옷차림이 검소하고 낭비나 사치는 마음에 없습니다.
매사가 철저한 경제적이므로 아주 구두쇠고 소금보다 짜다고 평이 납니다.
사람은 돈을 좀 써야 친구사이가 원만한데 소금처럼 짜고 인색하므로 친구관계에 문제가 있습니다.
묘는 나한테 경제적으로 이득이 된다면 죽자살자 매달리는데 한푼이라도 손해가 난다면 일찌감치 고개를 돌립니다.
실속 없는 일, 실리 없는 일, 비경제적인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반드시 실리가 있고 실속이 있고 경제성이 있어야 합니다.
묘를 가진 사람은 일반 생활철학이나 인생관도 하나에서 열 가지가 철저한 경제적입니다.
평생가야 호화로운 의식주는 아주 담을 쌓은 사람입니다.
철저하게 검소한 의식주 생활이 이 사람의 천부적인 인생관입니다.
사회생활은 주고받는 것인데 받기만 하면 됩니까 묘는 그 점이 좀 부족합니다.
소득이 없는 대가가 없는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경제분야로 진출해야 합니다.
종교와 철학하고는 거리가 있습니다.
글자풀이 사주에서는 辰戌이나 丑未가 있으면 절대 못산다고 합니다.
과부가 된다는 것은 남편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이런 여자하고 결혼하면 죽는다고 서슬이 퍼렇습니다.
좋은 궁합을 난도질해서 못살게 하고 결혼을 가로막는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알뜰하고 사치 모르고 낭비 모르고 검소하고 절약하는 살림꾼인 천부적인 직업여성으로서 최고의 배우자를 허무맹랑하게 내려치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겠습니까?
묘를 가진 사람은 대우가 좋으면 있는 정성을 다하는데 대우가 부실하면 좋은 데로 옮깁니다.
사람을 쓸 때 묘를 가진 사람은 조금만 대우를 해주면 몇 십 배로 일을 합니다.
십이운성을 보면 성격, 기질, 인생관, 직업 등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쓸 때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치의 마음은 모르니까 십이운성을 보면 누가 경리에 적합한지, 누구한테 금고를 맡기는 것이 좋은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묘를 가진 사람한테 맡기면 한푼의 부정이 없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아주 철저합니다.
묘를 가진 여성은 직장이 없는 직업여성이 아니면 무엇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합니다.
하다 못해 밥장사나 떡 장사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합니다.
남편의 월급만 가지고는 만족을 못합니다.
그러므로 대개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한 사람 중에 묘를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독립은 건록과 제왕을 타고난 사람이 적성입니다.
하지만 가장 경제적으로 독립하려고 하는 것은 묘를 가진 여성입니다.
남편의 사랑보다는 돈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만약에 자기 부인이 묘를 타고났다면 직장을 갖거나 장사를 하거나 뭔가 경제적인 활동을 시켜야 사람이 활달해지고 병이 안 생깁니다.
이런 것이 철학의 진리입니다.
내 아내가 경제적으로 구두쇠고 검소하고 절약하며 부부의 사랑보다도 돈을 좋아하고 돈버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글자풀이 사주에는 백번천번 말하지만 이런 것이 없습니다.
여자가 묘만 있으면 남편을 내리치는 과부팔자라고 하니 말이 됩니까?
알뜰하고 검소하고 살림꾼이고 뭔가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서 남편하고 잘 살겠다는 여자가 어떻게 해서 남편 덕이 없고 과부가 되고 팔자가 드셉니까?
그것은 사주가 아니고 사람을 망치고 생사람을 잡는 것입니다.
절(絶)
사람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면 육신은 흙이 되고 정신은 사라집니다.
육신과 정신이 완전히 분리되고 단절됩니다.
그것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無의 세계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無에서 태어난 有가 다시 無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은 물질이니 생과 사가 있고 죽으면 소멸되지만 정신은 무형의 기로서 생과 사가 없듯이 죽음이나 소멸이 없습니다.
육신에서 분리된 영혼은 떠돌면서 새로운 육신을 구합니다.
그것은 인간을 잉태하는 음과 양인 어버이를 만나는 것입니다.
어버이를 만나면 새 생명의 태기(胎氣)로서 환생합니다.
이는 육신과 정신이 갈라지고 끊어진 절(絶)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니 절처봉생(絶處逢生)이라 합니다.
육신과 정신이 단절되고 다시 환생하는 절처봉생의 운성을 절이라 합니다.
이는 생명의 세포가 처음으로 창조되고 탄생하는 것으로서 포(胞)라고도 합니다.
절은 육신에서 단절된 정신이 새로운 생명으로 잉태하는 태기요, 세포로서 육신 없는 영혼과 같습니다.
십이운성 가운데 양은 있고 음이 없는 것은 절뿐입니다.
육신이 없는 영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태기로서 가장 허약하고 무기력합니다.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육신이 없으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을 잃은 허공의 영혼이 구하는 것은 새로운 음이요, 육신입니다.
과연 어디를 가면 육신을 만날 수 있으며 허다한 육신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인간은 경험에 의해서 사리를 알고 사물을 분간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무엇이 옳고 좋으며 완벽한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절은 육신이 없음으로써 경험이 불가능하고 사리판단력이 없습니다.
단지 기분하나로 선택할 따름입니다.
자신을 좋아하고 사랑하면 무조건 따르고 선택합니다.
하지만 육신과 결합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좋아하고 사랑할 따름입니다.
만일 보다 더 좋은 사랑스러운 육신이 나타나면 그대로 반기고 따릅니다.
육신 없는 영혼이 제멋대로 좋아하고 싫어하며 사랑하고 헤어진다고 해서 따지거나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절의 영혼은 변화를 즐기고 새로운 것을 즐기는 변덕이 심합니다.
절처봉생 자체가 새로운 변화이듯이 절은 변화를 상징하는 별입니다.
일지나 월지에 절이 있으면 천성이 단순하고 담백하며 순수합니다.
모든 것에 관심과 흥미와 호기심이 많습니다.
비판적이 아니고 즉흥적입니다.
마음에 들면 금새 반기고 따릅니다.
상대가 무엇이고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하고 따질 필요나 겨를이 없습니다.
쉽게 끓는 냄비가 쉽게 식는다고 사랑에 쉽게 빠지면서 쉽게 헤어집니다.
지구력이나 참을성이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이 식고 싫어지면 싫증을 내고 새로운 것을 탐합니다.
보다 더 새롭고 아름다우며 기쁘고 즐거운 상대를 만나면 아무리 오래 사귀어 온 사이래도 이내 뿌리치고 바람처럼 날아가고 사라집니다.
애정에 일찍 눈을 뜨고 애정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유별납니다.
어려서부터 자신에 대해서 아끼고 사랑하는 정성이 대단하며 앞뒤를 가리지 않고 뛰어듭니다.
같은 또래 끼리는 사랑하고 좋아하지만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것은 아닙니다.
무조건 귀여워하고 뜨겁게 사랑하며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상대는 나이가 많은 사람입니다.
절을 가진 인생은 자신보다 훨씬 연상인 상대를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무엇이 사랑이고 인생인지를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따르고 사랑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이든지 갖고 싶어합니다.
생각하면서 사랑하는 게 아니고 뜨거운 열정으로 빠져듭니다.
꿈같은 사랑을 탐하고 무지개 같은 꿈을 즐깁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러한 사랑과 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쉽게 싫어지고 염증이 생기며 새로운 변화를 원합니다.
보다 새롭고 싱싱하며 뜨거운 열정이 나타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서 덥석 안기고 흠뻑 빠집니다.
구태의연하고 지루한 것은 질색입니다.
생생불식하는 신진대사가 꿈이고 염원입니다.
과연 이 세상에 생생불식하는 신진대사가 가능하며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젊어서는 끝없는 애정행각이 가능할지 모르나 어른이 되면 쉽지가 않습니다.
하물며 결혼을 한 인생으로서는 위험천만한 불장난입니다.
겉으로 볼 때 절은 지극히 단순하고 순박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지극히 자기 위주고 욕심이 많으며 냉혹하리 만큼 냉정합니다.
남이야 어찌되든지 나만 이롭고 잘 살자는 것입니다.
영리하고 간사해서가 아니고 타고난 운기가 너무나 허약해서 생각하고 분별할 능력과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참고 견디는 아량과 관용이란 더더욱 없습니다.
무모하고 무책임하리만큼 즉흥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고 일관성이 없습니다.
낡은 것은 싫증이 나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항상 새롭고 또 새로워야합니다.
요행히 진실하고 정직하며 착하고 너그러운 상대를 만나면 다행으로 평생 해로할 수 있지만 간사하고 음흉하며 지능적이고 타산적인 늑대를 만나면 후회하고 발버둥쳐봐야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절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사주의 時支에 절이 있으면 후사가 끊어짐을 암시합니다.
자자손손 천세만세 연면하기를 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후사가 없다는 것은 결코 심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 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시지에 절이 있습니다.
양자를 얻었지만 실패했습니다.
양자가 죽은 것은 바로 아들의 별이 절이 되는 해입니다.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의 조화입니까?
하지만 이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時支에 절을 가지고도 아들을 얻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甲은 시지에 절이 있으면서 외아들을 두었습니다.
아들은 일찍 유학을 하고 외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甲은 늙으면서 아들 생각이 간절했고 같이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살아남은 것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한계가 있듯이 운명도 한계가 있습니다.
가까운 것은 운명의 작용을 피할 수 없지만 멀리 떨어진 것은 한계선을 넘은 것으로서 운명 의 작용을 면할 수 있습니다.
甲은 사주에 관심이 많고 일가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식을 위해서 무척 외롭지만 멀리 떨어져 살기로 했습니다.
외지에 있는 자식은 있으나 마나 이지만 후사를 위해서는 헌신과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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