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9월 15일 고상돈 에베레스트 위에 서다.
9월 15일은 산악의 날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 날이 한국인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그 발자국을 찍은 날이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고상돈이라는 산악인이다. 남한 최고봉이 있는 한라산 아래에서 자라고 은근과 끈기를 자랑하는 충청도에서 학창시절과 직장 생활을 했던 그는 1977년 9월 15일 한국 에베레스트 등반대의 제 2차 공격조로서 셸파 펨파 노르부와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는다.
제주도 출신이지만 그의 어머니는 이상하게도 그가 물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심지어 바다에 들어갔다 온 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아들의 몸에 그림까지 그려 두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혼나는 것도 혼나는 거지만 잔등에 그려진 이상한 그림들을 친구들에게 뵈기 싫었던 소년 고상돈의 놀이터는 그저 학교 운동장이었다. 그때 제주도 어디에서나 뵈는, 하지만 대개 구름에 가려서 그 꼭대기는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 한라산은 아직은 제 운명을 모를 어린아이를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나보다 네 배는 높은 산을 오를 운명이라”면서. 고상돈 자신도 이런 회고를 하곤 했다. “패싸움에 휘말렸다가 도망갔는데 그게 한라산 쪽이었고, 쫓아오는 이가 없어 숨을 돌리다보니 한라산 정상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오르고 싶었다.
일본을 왕래하며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아들을 교육 도시 청주로 진학시켰는데 거기서 소년 고상돈은 당당히 지역 명문 청주 중학교에 입학하여 아버지를 들뜨게 한다. 하지만 대학 진학에는 난항이 있어서 암울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기도 하지만 마음을 잡고서 야간대학을 진학하고 직장도 청주에서 가진다. 그리고 산악회에 가입하여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운명의 가닥을 잡는다. 하지만 그도 초반에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했다. 자일에 매달려 있던 중 하도 흡연욕구가 나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가 벼락을 맞는 것이다. “이 새끼야. 그 담뱃불이 자일을 태우면 너도 죽고 네 동료들 다 죽어 이 미친 놈아.” 뺨을 맞고 쫓겨나기도 했다. 산사나이들의 세계 뿐 아니라 다 마찬가지겠지만 뭔가 일을 해 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한 번 안한다고 하면 과감하게 끊어 버리는 의지다. 이 사건 이후 그는 담배를 평생 입에 대지 않는다.
한국의 유능한 알피니스트로 평가받던 그는 한국일보 장기영 사주가 적극 후원하는 한국 에베레스트 등반대의 일원이 된다. 전국 각지에서 맹훈련을 하던 중 1976년 2월 설악산 공룡능선에서 뜻밖의 사고를 만난다. 코스 훈련을 마치고 철수하던 중의 대원들을 눈사태가 덮쳐 3명의 사망자가 난 것이다. 그 가운데 경험 많기로 유명했던 최수남 훈련대장의 죽음은 뼈아팠고 그 사고 자체가 무전기 하나 제대로 구비하지 못해 일어난 사태라는 것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생존자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눈을 파헤치다가 기진맥진했을 때 그 앞에 나타난 것이 고상돈이었다. 그 역시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짐이 많으니 마중 나가라는 지시를 받고 현장에 도착했던 것이었다.
에베레스트 등반대가 출발하던 날 최수남 대장의 아내가 공항에 나타난다. 산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는 세계 최고봉의 산을 오르려는 대원들에게 호소한다. “진혁이 아빠 소원을 풀어 주세요.” 그때 눈물을 훔쳤던 산사나이들은 아마도 성공하지 않고는 못배길 심경이었으리라.
현지 등반 도중 뜻밖의 행운과 만난다. 외국 등반대들이 쓰지도 않고 버리고 간 산소통 수십 개를 고스란히 손에 넣은 것이다. 에베레스트가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다는 보도는 오래 전부터 나왔지만 외국 등반대의 부주의하고 무성의한 투기 행위는 한국 등반대원들에게는 고마운 은전이 됐다. 등반대장 김영도는 몇가지의 원칙을 세웠다. 첫째, 기술보다는 팀워크를 중시하며 둘째, 어떤 환경이든 적응할 수 있는 성격이라야 하며, 셋째, 히말라야 특성에 비추어 20대 전후의 젊은이를 택한다. 그리고 넷째, 선후배 의식을 제거하고 개인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다. 다섯째, 지방산악인을 다수 기용한다. 여섯째, 정실을 배제한다. 일곱째, 현지 산행에 경험 있는 사람을 우선 선발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해서 이런 것들이 ‘원칙’이라는 것이 세워지는 것이 이상하다. 하지만 2002년에도 히딩크가 “실력 위주의 선발”을 목놓아 외쳤던 것을 떠올리면 이해도 간다. 더구나 에베레스트 한국인 초등이라는 전무한 업적의 주인공을 가리는 일이 아닌가.
에베레스트 정상의 코 밑에서 1차 공격조가 정해진다. 8000미터 고도에서도 산소통을 쓰지 않고 자유로이 나다녀 셰르파들로부터도 찬탄을 받았던 강철 체력 박상열 대원과 셰르파 하나. 하지만 박상열 대원은 자기 몸을 과신했던지 8500미터 고지에서 산소통을 쓰지 않고 자다가 극심한 체력 소모를 맞게 된다. 마침내 등반대 본부에 날아든 셰르파의 무전. “배고프다 피곤하다. 산소도 없다.” 등반대장 김영도는 악을 쓴다. “둘 다 죽어! 어떻게든 내려와!” 천신만고 끝에 둘은 살아서 내려오지만 이제 산소통도 별 여유가 없었다. 뜻밖에 노획(?)한 산소통을 합쳐 28통. 이것을 메고 올라갈 2차 공격조로 고상돈 대원이 뽑힌다. 그는 이렇게 각오를 다진다. “이 도전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건 생명의 파멸을 뜻하는 것이다. 패배란 죽음만큼 괴로운 것이다.”
2차 공격. 그리고 마침내 고상돈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다. 칼날같은 최후의 능선을 타고 오른 후 1평 남짓한 정상에 섰고 셰르파는 이곳이 정상이라고 외쳤지만 고상돈은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그때 뭔가 발뿌리에 차인다. 트라이포드였다. 1975년 중국 등반대가 남기고 간 것이었다. 정상이 맞았다. 고상돈은 그 순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나이였다. 셰르파와 알피니스트로서가 아닌 남자대 남자의 친구로 함께 에베레스트에 오른 셰르파 펨바 노르부는 짐승같이 울부짖으며 서로 끌어안았고 함께 둘에게 관대했던 에베레스트의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고상돈은 설악산에서 죽어간 에베레스트 등반대원 3인의 사진을 만년설 속에 묻는다. 사진 속에서나마 고인들도 환하게 웃으며 축하했으리라.
그 영광으로부터 2년이 지나지 않아 고상돈은 고인이 된다. 북미의 험한 산 매킨리를 등정하고 내려오다가 그만 추락, 사망하고 만 것이다. 이때 그의 죽음의 배경으로 들어지는 것이 한국인 산악인들끼리의 경쟁이다. 그 시즌에만 고령 산악회와 고려대학교 산악회가 고상돈의 한국일보 산악회와 함께 매킨리에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누구와의 경쟁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이라지만 ‘1등 이외에는 기억해 주지 않는’ 천박한 사회의 악령은 그때도 그 그림자를 들이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위대한 한국인 등반가 박영석 역시 등산장비회사와 언론사의 마케팅 경쟁 속에 희생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짧게 세상에 왔다가 세계 최고의 사나이가 된 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가버린 사나이. 고상돈이 1977년 9월 15일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출처 : 산하의 썸데이서울 - nasanha.eglo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