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풍수는 신라시대 도선을 시조로 여러 가지 사상을 받아들이며 발전했다. 땅을 살아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천지의 생기가 땅을 통해서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다. 중국의 풍수와 다른 점은 ‘나쁜 땅을 살려 쓰는’ 비보(裨補)의 개념을 중시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당나라 때 풍수가 성행하였다. ‘청오경’, ‘금낭경’, ‘명산론’과 같은 장서를 통해 풍수이론의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국의 풍수이론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서민은 난해한 용어와 한자로 되어있다는 점에서 풍수설을 접하기 어려웠다. 풍수설 자체보다는 풍수설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즉 풍수설화가 민간에 파고들어 신앙처럼 일상생활에 깊게 뿌리를 내렸다.
가난한 총각이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가 죽으며 바다가 보이는 곳(친정이 있는 곳)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총각은 산에 올라가 시신 묻을 구덩이를 파고 보니, 바다가 안 보일 것 같아 시체를 세워서 묻었다. 그 뒤 살기가 맘먹은 대로 되어 장가도 가고, 집도 짓고 큰 부자가 되었다.
자식은 어머니의 유언을 지킨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시신을 세워 무덤을 썼지만, 그 뒤 일어나는 일련의 발복(發福)이 명당 상점의 결과로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풍수로 보면 그 묏자리가 ‘촛대봉’이기 때문에 세워 써야 명당이 될 수 있었다.
이 설화에서 땅은 삶의 행복과 복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사대부를 중심으로 묏자리를 찾는 음택풍수가 유행하였다. ‘주역’과 ‘음양오행’의 사유, 전래 풍수사상을 바탕으로 경험철학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과학적이다.
지금에 와 풍수지리는 크게 세 가지 용도를 갖고 있다. 첫째, 땅의 기를 살펴 실용한다. 둘째, 땅에 건축을 할 때 공간배치를 풍수적 원리에 입각해 한다. 셋째, 피융추길(避凶趨吉)의 원칙과 비보(裨補)의 풍수로 좋은 기를 받고, 나쁜 땅은 고쳐 쓴다.
정치인 이 모씨는 팔자에 벼슬 운이 없는 사주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수십 년 동안 장관 등 높은 자리를 유지했다. 답은 그의 생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생가는 풍수지리의 고전 ‘인자수리’에서말하는 조진(朝進) 명당이다.
“고을에서 으뜸가는 거부가 되고, 높은 자리의 벼슬아치가 나온다.”라는 자리이다.
더구나 그의 조부는 땅의 힘을 믿어 집 뒤쪽의 산등선을 완벽한 명당으로 만들기 위해 보토를 하였으니, 비보풍수로 득을 본 경우라 하겠다.
우리의 풍수는 여전히 일반 사람의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다.
김상회 (사)한국역술인협회 중앙부회장
출처 : [김상회 사주오디세이]좋은 땅은 복을 불러 들인다 - cafe.daum.net/dur6f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