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길 너머 400년을 오가다
동대구 도심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구멍가게 하나 없는 전통마을이 있다. 팔공산 자락에 숨겨진 대구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이다. 오래된 집들을 둘러싼 담장 또한 명물이라, 지난 6월 문화재청은 이곳의 돌담길을 등록문화재로 고시하기도 했다. 이번 여름방학 기간에는 아이들과 함께 도심 속 한옥마을을 방문해 보자.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마을 구석구석에 숨겨진 전통의 흔적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1. 풍수지리 - 물 만난 거북 이야기
복숭아와 자두가 익어가는 과수원길을 지나면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동네, 옻골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 이름은 옻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은 1616년 대암(臺巖) 최동집 선생이 집을 지어 정착한 후 400년 가까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
첫인상은 전통마을의 화려한 위용과는 거리가 멀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느티나무 숲,회화나무 두 그루가 무척 정겹다. 이들은 모두 수령 350년을 자랑하는데,이 마을의 역사와 비슷한 연배다. 특히 회화나무는 이곳 옻골에 찾아들어 처음 마을을 세운 대암 선생의 이름을 따 '최동집 나무'로도 불린다. 또 하나 대암 선생과 인연이 깊은 바위가 있으니, 마을 뒷산에 혹처럼 불거진 '대암'이 그것이다.
'대암'은 거북을 닮았다고 해서 '생구암(生龜岩)'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입향조 최동집 선생의 분신 즉,마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풍수지리학 상 거북이 사는 데는 물이 필요하다 해서 마을 앞에 인공연못이 조성됐다. 이 연못을 둘러싼 남쪽 느티나무 군락은,마을의 양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는 비보숲(裨補,마을을 보호하는 숲)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렇게 풍수지리,음양오행을 따져가며 집자리를 정하고 가꾸었는데 요즘에는 아무 데나 집을 지으니 수해가 안 날 수 있겠습니까?"
마을 안 종가에서 만난 경주 최씨 광정공파 14세 종손 최진돈(60) 씨는 전통건축의 지혜가 전승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 2. 성리학 - 건물 배치에도 위계가 있다
이처럼 옻골마을의 입지가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면, 건물의 배치 방식은 성리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성리학에서는 건물 배치에도 위계를 둔다.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물은 가장 뒤에 배치되는데, 마을 제일 안쪽에 종가가 자리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종가 중에서도 조상의 공간인 사당이 가장 뒷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옻골마을의 종가는 조선 영조 때의 학자 백불암(百弗庵) 최흥원 선생의 호를 따 '백불고택'이라 불리는데,대구지역 주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대구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에는 종손을 비롯한 가족 4명이 살고 있는데,명문가의 종가답게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설 명절 때는 하루에 300여 명 분의 떡국을 끓여내야 할 정도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고택의 안채 마루에 커피 자판기 하나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위해 일일이 차를 끓여낼 수도 없고 종가 인심에 내 집을 찾은 사람을 맨입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는 형편이라,손님 접대를 위해 설치했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 동쪽 문을 통해 백불암 선생의 불천위(不遷位,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 사당인 가묘로 갔다. 정문은 조상 신이 드나드는 곳이라서 잠가 두었다. 그래서 왼쪽 측문을 이용했다.
문화관광해설사 박만현(56) 씨는 "일반적으로 사당으로 가는 문은 낮고 좁은데,이는 자손들이 조상을 뵈러 갈 때 항상 몸을 낮추고 머리를 조아리게 해 겸손한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가묘 옆으로 난 문은,160㎝가 조금 넘는 작은 키의 기자조차도 고개를 빳빳이 들면 머리가 부딪힐 정도로 낮다.
# 3. 무위자연 - 자연에서 찾은 건축 미학
가묘 옆 작은 문을 다시 빠져 나와 동쪽 보본당으로 향했다. 재실인 보본당은 대암 선생의 불천위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1753년에 건립한 건물이다.
이곳의 너른 마루는 나뭇결을 그대로 살려 짜 맞춘 것으로,이음새의 빈틈조차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맛이 있다. 기둥 아래 주춧돌의 높이도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 자로 잰 듯한 인공미를 배제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굴도리. 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른 나무가 곧지 않고 구불구불하다. 나무 본래의 모양을 살려 통으로 쓴 것인데,곡선미와 자연미가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보본당 마루의 뒷문을 통해 별묘(別廟)를 보면,두 건물의 중심이 정확하게 겹쳐진다. 그러나 이 역시 단순한 일직선 배치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자세히 보면 별묘 뒤로 보이는 뒷산의 '대암'이 그 중심의 연장선 상에 놓여 있는데,이는 곧 결국 입향조의 분신이기도 한 '대암'이라는 자연물을 법칙으로 삼아 건물의 위치를 잡았다는 뜻이다. 전통건축에 숨겨진 의미가 찾아 볼 수록 놀랍다.
이번에는 개울물 소리를 따라 동계정으로 갔다. 동계정은 백불암 선생의 아들인 동계(東溪) 최주진 선생의 학문을 기려 세운 정자다. 6·25 때 마을의 서당으로 쓰이는 등 주로 강학의 장소로 이용돼 왔는데,시원한 물소리가 머리까지 맑게 해 주는 듯 하다. 주변 풍광도 마을에서 가장 아름답다.
동계정을 지나 돌담길 사이를 돌고 돌다 보니,어느새 발걸음은 다시 종가에 닿아 있었다.
이 작은 전통마을에는 사실 큰 볼거리가 없다. 옻골마을은 인위적으로 조성한 민속촌도 아니고 체험 프로그램으로 무장한 체험마을도 아니기에,볼거리도 즐길거리도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다.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떠나온 이가 있다면,마을 입구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을 찾아가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마을에는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은 해설사가 상주하고 있다.
문의 대구시청 관광과 053-803-3901. 글·사진=이자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