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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 점성촌’에 살어리랏다
빠담빠담 2017-10-01 (일) 11:41 조회 : 1917

‘미아리 점성촌’에 살어리랏다
[한겨레21 2005-02-18 18:12]

[한겨레] 역학인 양성교육과정 마치고 ‘제2의 인생’ 시작한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의 직업 역술인들
▣ 글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화려한 꽃다발 세례나 학사모는 없었다. 그러나 졸업장을 받아쥔 이들의 얼굴은 환했다. 검은 선글라스 뒤 초점 잃은 눈동자는 여전히 표정을 담을 수 없었지만 입꼬리엔 미소가 어렸다. 고생스런 공부를 끝냈다는 기쁨이었다. 새로운 앞날에 대한 작은 희망이었다.
서울 성북구 동선동4가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 흔히 ‘미아리 점성촌’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잡은 이 복지관에서 2월1일 작은 졸업식이 열렸다. 1년 동안의 역학인 양성교육을 마친 11명의 수료생들과 이들을 가르친 선생님들의 수고를 위로하는 자리였다. 졸업생들이 세상의 시련에 굴하지 않고 떳떳이 자립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마음이 담긴 날이었다.
2004년, 절망의 바닥에서 잡은 끈
졸업생 문충성(36·서울 양천구 신월동)씨도 마음이 벅찼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했던 그는 몇년 전부터 눈이 침침해져옴을 느꼈다. 조명등이 켜지지 않은 어두운 계단에선 한발 내딛기가 어려웠고 눈가에 테를 씌운 듯 시야가 좁아졌다. 일상의 불편은 생계의 위협으로 이어졌다. 전자부품 제조·수리업체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그는 손에 익은 부품은 감으로 만질 수 있었지만 신제품의 경우엔 깨알만 한 글씨로 씌어진 매뉴얼을 일일이 대조하며 작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참다 못해 안과를 찾은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야 했다. 망막세포변성증. 망막의 시신경세포가 장애를 일으켜 결국엔 시력을 잃는 무서운 병이었다.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 했던가. 하루하루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가운데 회사도 부도를 맞으며 문을 닫았다. 지체장애 2급에 실업, 시각장애까지, 모두들 월드컵의 흥분에 겨워 있던 2002년 그는 지독히 불행했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동안 다리가 불편했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다리는 목발이나 휠체어를 빌리면 되지만 눈을 잃으니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는 것 같았습니다.” 절망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는 것 같았다. 눈만큼 마음도 어둠이었다. 캄캄한 심연 속에서 버둥대며 하루에도 수백번씩 죽음을 떠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절망이 바닥을 친 것이었을까. 죽을 용기가 없을 바에야 열심히 살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자기인정은 배움으로 이어졌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남의 도움 없이 홀로 서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몸이 불편해도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것처럼 시각장애인으로서도 밥 벌어먹고 살 방법을 찾기로 했다. 닥치는 대로 정보를 구하던 중 시각장애인들끼리 모여 역학교육을 베푸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됐다. 이전엔 한번도 점을 본 적이 없었지만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점이 맘에 들었다. 고난과 역경이 어떤 것인지 철저히 겪어본 사람으로서 남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2004년 2월 용기를 내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을 찾았다.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이 직업교육 차원에서 마련한 ‘역학교육’은 1년 동안 숨가쁘게 진행된다. 매년 2월 신입생을 모집해 면접 심사를 거친 뒤 3월에 새 학기를 시작한다. 처음엔 궁합·택일 등을 일러주는 <요집서>를 뗀 뒤 5월부터 사주학을 비롯해 산통·거북점 등을 통해 괘를 풀이하는 육효학, 작명·해명을 주로 하는 성명학을 공부한다. 마지막엔 희망자에 한해 독경을 할 수 있는 경문 공부로 마무리짓는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역학교육은 뿌리가 깊다. 대한맹인역리학회가 역학교육을 시작한 것이 81년. 맹인들의 결사체이자 교육 양성소였던 ‘맹청’까지 거슬러올라간다면 조선시대 효종 임금대(1668)까지 닿는다. 1998년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이 생기고 난 뒤엔 역리학회로부터 전통을 이어받아 복지관의 정식 교육 프로그램으로 자리잡게 됐다. 경제적으로 막막한 시각장애인을 서로 도와주자는 취지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이곳에선 강의료를 한푼도 받지 않는다. 서울 아닌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복지관에서 방을 내주어 숙식을 해결하도록 해준다. 보통 정원 20명보다 1.5~2배 많은 사람들이 입학 신청을 하는데 장애등급·성별 등엔 제한이 없지만 중도실명자 중 점자·보행이 어려운 사람들을 선발 우대한다.
대한맹인역리학회의 1기 졸업생이자 이곳에서 사주학을 강의하는 심남용(56)씨는 “눈 잃은 아픔은 우리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평등을 바란다. 나라에서 주는 생활지원금만 가지고 살아간다면 하다못해 동사무소에서 가서라도 당당하게 제 요구를 할 수 있겠는가. 학생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금 내고 사는 인생’을 살자고 누누이 강조한다.”
“세금 내는 당당한 인생 살자"

부유한 사업가였던 심남용씨는 30살에 찾아온 포도막염증으로 시력뿐 아니라 재산도 명예도 한꺼번에 잃고 말았다. 코앞의 물체도 전혀 식별할 수 없게 된 무렵에도 자존심 강한 그는 한사코 ‘안질환자’라고 고집했다. 방황 끝에 ‘시각장애인’으로 자신을 인정한 뒤 ‘청송심씨 양반가에서 무슨 점쟁이냐’는 마지막 자존심을 꺾고 나서야 본격적인 역술인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20만원 보증금에 월세 2만5천원의 허름한 방에서 시작한 ‘철학관’은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일요일이면 친구들을 불러서 책을 읽혀가며 공부를 했다는 그는 “당시에 시각장애인복지관 같은 곳이 있었다면 고생을 덜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부분 시각장애인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역학공부를 시작하지만 1년 동안의 공부만으로는 당장 ‘창업’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엉덩이에 풀 날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역술의 이치를 깨달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충성씨는 졸업과 동시에 역술인자격시험을 통과했지만 요즘도 강의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를 들으며 집에서 반복 학습을 하고 있다. 남의 운을 논할 정도로 공부가 깊어졌다고 판단될 때 철학관을 낼 계획이다. 드물긴 하지만 실력이 탄탄할 경우엔 역학인 양성교육을 받은 뒤 바로 개업을 한다. 문씨보다 한해 앞서 공부한 김선중(40·청암사주닷컴)씨는 졸업 직후 복지관 맞은편 미아리고개에 철학관을 내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복지관의 역학교육은 후학 양성뿐 아니라 외로운 시각장애인들에게 정서적인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문씨의 동기생인 정대흥(46·서울 노원구 월계동)씨는 “가족적인 분위기로 함께 공부하고 졸업 뒤에도 운생계라는 ‘동창회’를 통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친목을 다지는 점이 좋다”고 말한다. 그는 “보증금이 족히 5천만원은 필요하기 때문에 당장은 어렵지만 기회가 되면 미아리로 이사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외로운 이들의 정서적 구심점
‘몸값이 만냥이면 눈값이 구천냥’이라는 옛말이 있다. 남들이 만냥으로 살아갈 때 천냥에 의지해야 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자기의 혹독한 운명을 인정하는 자기와의 투쟁을 격렬하게 벌이게 된다. 심남용씨는 “한번쯤 죽음 같은 절망에 치열하게 다가가본 사람들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주역의 원리를 체득하게 된다”고 말한다.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운 건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겨울이니 추우려니, 여름이니 더우려니 마음을 다지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시각장애인들이 직업으로서 역술을 배우면서 또 하나 인생의 깨달음으로 삼는 것이 그것이다.”

기우제·과거시험·맹청… 맹인역술의 역사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도 현실적으로 시각장애인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다. 안마, 침술, 역술. 청각에 예민한 시각장애인들이 컴퓨터 음악 같은 전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례가 있지만 이 역시 최근의 일일뿐더러, 누구나 배워서 하기에는 선천적인 재능이 요구되는 분야다. 안마, 침술, 역술 가운데 가장 오랜 연원을 가진 것은 역술이다. 안마는 일제강점기에 맹인학교에서 직업교육의 일환으로 안마술을 가르친 것에서 시작해 역사가 100년이 넘지 않으며 침술 또한 한의학의 치료방법이기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이 독점하는 직업이 되기는 어려웠다.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일이 다르지 않던 시절, 사람들은 천신·일월성신·산신·조상신에게 정기적으로 제를 지냈고 가뭄·기근이 들거나 전염병이 돌 때 예를 올려 앞날을 기원했다. 이런 풍습은 연년세세 이어져 불교와 도교가 성행한 고려시대에는 사찰과 도관에서 제를 지냈고 유교 중심의 조선시대에도 나라 차원에서 구병기도·기우제가 벌어졌다. 제례를 행할 때 맹인 무당은 군왕을 대신해 제를 집행하는 제주의 역할을 도맡았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문헌들에는 고려 충렬왕 때 심한 가뭄이 들어 맹인이 기우제를 행했고 조선 성종 때엔 점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맹인들로 하여금 기우제를 올리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맹인들이 공직에 입문하는 제도도 마련됐다. 고려 광종 때부터 실시한 과거제도에는 역학·음양학 등을 과거제도에 포함해 점복인을 등용했고 태복감을 설치해 점복 행정을 관장하게 했다. 태복감에서 일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중인 정도의 지위를 보장받았고 많은 이들이 점복업에 진출해 경제적 자립을 이뤘다. 조선조에 들어 숭유억불 정책이 시작됐으나 태조는 새로 도읍을 옮긴 서울에 맹인 승려를 위한 절(명통사)을 지어 나라 위한 축원을 전담하게 했다. 또 세종 때엔 서운관에서 2년 과정으로 천문·음양학·육효·명리요강·사주 등을 가르쳐 맹인 역술가를 길러냈다.
맹인 역술인들이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효종 임금 때 들어서다. 효종의 셋째아들인 계산대군이 어려서 시력을 잃었는데 계산대군은 당시 유명한 복술가였던 국종호를 만나 삶의 뜻을 찾게 된다. 효종은 이를 대견스러워하며 맹인 역리업자의 결사체인 ‘맹청’을 서울 중구 저동에 설립하도록 했다. 맹청에 속한 이들은 독경에 나아가는 차례를 정해 일을 나눴고 ‘물위패악’ ‘물위탐욕’ 등의 엄격한 규율을 지키도록 요구받았다. 영·정조 시대엔 서울에만도 900명의 맹인이 맹청에 속해 있을 만큼 번성했는데 1894년 갑오개혁으로 맹청제도는 폐지된다.
일제시대 들어 미신을 타파한다는 이유로 맹인 역술인들의 탄압은 계속됐다. 이에 방덕권·김병순 등 수백명이 모여 총독부 앞에서 시위를 벌인 끝에 마침내 생업을 위해 점복맹인을 묵인한다는 허락을 받았다. 1925년 ‘역리대성교’라는 맹인조합은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1971년 사단법인 대한맹인역리학회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대한맹인역리학회는 학회 재산을 털어 1992년 점자도서관을 개관했고 이후 회원들의 십시일반으로 1998년 도서관 터에 복지관을 세우기에 이른다.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 조희도 복지과장은 “복지관에선 역학·컴퓨터 음악 등 직업교육 외에도 시각장애 어린이들의 음악 지도, 점자책 제작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며 “조선시대 맹청으로부터 비롯한 경제적 자립과 교육이라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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