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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관상법으로 선조 질환 밝힌다 |
초인
2017-09-30 (토) 08:01
조회 :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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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버섯, 코주부 가감 없이 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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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2월 28일 |
| 글 | 편집부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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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초상화를 보면 깔끔하고 백옥같은 피부의 얼굴은 의외로 없다. 주근깨나 저승꽃, 또는 깊게 패인 주름살이 초상화 주인공의 인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에 비해 서양의 초상화는 하나같이 미남·미녀뿐이다. 우리 초상화의 이같은 특징을 살려 선조들의 피부병을 연구하는 의학자가 있다. 일명 관상 진단법. 의학자가 어떻게 전통 초상화를 연구하는지 알아보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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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호불사편시별인(一毫不似便是別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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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병이 나이든 전사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그림이 그리스 시대 술잔 바닥에 그려져 있다(왼쪽). 하이든의 초상화. 하이든은 초상화 모습과는 달리 곰보에 매부리 코였다고 한다. | 터럭 하나라도 똑같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이라는 말이다. 숙종 14년 3월 7일자 승정원 일기에 나오는 이 말은 우리나라 전통 초상화에 적용돼온 오랜 철칙이다. 이같은 원칙에 따라 우리나라의 전통 초상화는 대상을 미화하는 서양 인물화와는 달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정직하고 가감 없이 그려냈다. 특히 우리 초상화는 그 사람이 죽기 직전 그려진 것이 많아 조선시대 ‘질병사’연구에 이보다 더 좋은 자료는 없다.
수원 아주대병원 피부과 이성낙 교수는 우리나라의 이같은 극사실주의 초상화에 관심을 갖고 이른바 ‘관상 진단법’을 연구하고 있다. 관상 진단법이란 사진이나 그림만 보고도 그 사람의 건강 상태를 알아맞히는 것. 이교수의 독특한 진단법은 27년 동안 전통 초상화에 골몰해온 노력의 산물이다.
하이든의 원래 얼굴은 곰보와 매부리코 원래 초상화는 사진이 발명되기 전, 특정 인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는 목적을 갖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기록이라는 특성 상, 초상화는 산수화나 화조화(花鳥畵) 등 다른 분야의 회화보다 훨씬 긴 역사를 지닌다.
서양에서는 그리스 시대부터 그림을 통해 인물의 모습과 특정 사실을 기록해 왔다(즇). 이 그림은 비록 한 인물만을 정확히 포착한 초상화의 형태는 아니지만, 그림을 통해 의학적 사실을 그대로 재현한 ‘기록화’의 형태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 젊은 병사가 부상당한 늙은 동료병사를 열심히 치료하고 있다. 부상병은 아픔을 참느라 왼쪽다리는 벽에 의지하고, 치아 사이에는 무엇인가를 꽉 물고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고 있다. 이로 미뤄봐 마취 없이 화살이 박힌 상처를 치료하는 중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교수는 “이 그림의 흥미로운 점은 인물들의 사실적 묘사도 있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기원전 5백년 전에 이미 ‘붕대’가 있었으며, 그 감는 방법이 오늘의 ‘사선절대법’(spiral reverse)과 유사하다는 점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서양 초상화의 사실주의 전통은 중세부터 19세기 미술을 거치면서 많이 사라졌다. 물론 르네상스와 로코코,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초상화는 수도 없이 그려졌지만, 대부분 대상을 미화하거나 종교적 색채의 그림이 많아 대상의 정확한 묘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대상의 미화는 서양 초상화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이든의 초상화를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하이든은 18세기 후반의 빈고전파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다(즊). 지금 남아 있는 그의 초상화는 상당한 미남형으로 깔끔한 피부 상태로 표현돼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전 고려대 법의학 교수인 문국진 박사는 그의 저서 ‘바흐의 두개골을 열다’에서 “하이든은 실제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곰보가 남아 있었으며 코도 유난히 크고 구부러져 매부리코에 코 끝에는 항상 습진 비슷한 것이 더덕더덕하게 남아있고, 아랫 입술마저 약간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고 밝혔다. 즉 미남이라기 보다는 추남에 가까웠던 것이다.
어떤 조작도 용납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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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초상화의 전신사조 전통을 자장 잘 보여주는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회화로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됐다(왼쪽). 18세기 대표적 학자 중 한 사람인 조항진의 초상화. 얼굴에 나타난 검버섯이 그대로 표현돼 있다(오른쪽). | 이에 비해 동양의 초상화, 특히 우리 초상화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기록하는 전통이 있었다. 명지대 미술사학과 유홍준 교수는 “서양과는 달리 우리 초상화가 극사실주의 전통을 지켜온 이유는 초상화가 그려지는 방식의 차이에 있다”고 말한다. 즉 서양의 초상화는 대상이 되는 인물이 화가한테 직접 부탁해 그려지는 방식이기 때문에 화가는 구매자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상을 미화했지만, 우리 초상화는 대부분 왕의 명령을 받은 화공이 그리는 방식이라 대상을 미화할 수 없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영의정이나 대제학 등 높은 벼슬을 한 사람도 그 벼슬이 끝나면 고향으로 내려가 후학 양성에 힘쓰는 것이 관례였다.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려는 것이다. 그러다 이 사람이 생을 마감할 때가 되면 나라에서는 전문 화공을 그 고향으로 내려보내 왕명으로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나라에 공헌한 훌륭한 재상의 모습을 길이길이 보전하겠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초상화는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대상을 좀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한 어떤 ‘조작’도 용납되질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일호불사편시별인’의 시대적 분위기도 작용했다. 원래 이 말의 유래는 ‘성종실록’ 19권에 나오는 ‘인사부모지진 일호일발불사 즉비부모의’(人寫父母之眞 一豪一髮不似 則非父母矣)라는 말이다. 사람이 부모의 초상화를 그림에 있어 털오라기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부모가 아니라는 뜻인데, 정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성리학을 국가 기반 철학으로 삼았던 조선사회에서 이 말은 곧 초상화 제작의 제1계명으로 철저히 지켜졌다.
교양과 기품까지 담아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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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두와 흔적이 적나라하게 나타난 이덕수의 초상화(왼쪽). 간질환이 담낭질환으로 나타나는 흑달 증세가 표현된 오명항의 초상화(오른쪽). | 또한 우리 초상화의 사실주의 경향은 초상화를 ‘전신사조’(傳神寫照)로 생각하는 전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유교수는 “전신사조라는 말은 진정한 초상화란 서양의 초상화나 현대의 인물사진처럼 어떤 개인의 외모를 담아내는데 그치지 않고 그 위에 개인의 성격, 인품, 교양 등 이른바 정신세계를 담아내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한다. 윤두서의 ‘자화상’이라는 그림을 보면 전신사조의 전통을 극명히 알 수 있다.
공재 윤두서는 숙종 연간에 활약한 대표적 선비화가다. 그는 당대의 명문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고산 윤선도가 그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은 그의 외증손이 된다. 이런 그였지만 세상은 끝내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평생을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고 삶에 지친 그는 결국 고향 땅 해남으로 낙향한다. 바로 이때 그린 그림이 ‘자화상’이다.
‘자화상’은 얼굴만을 그리는 일종의 초상화라 할 수 있는데, 상투 위와 수염 아래쪽은 모두 생략하고 얼굴만 부상시키는 구도가 파격적이다. 원래 이 그림은 풍만한 어깨선을 희미하게 그려넣은 것이었는데, 후대에 보수하는 과정에서 아예 지워져버려 마치 허공에 떠오른 얼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범의 모습을 한 준수한 얼굴은 윤기가 역력하며 정면을 응시하는 눈초리가 자못 삼엄해, 보는 이의 시선을 단숨에 압도해버린다. 그의 눈빛에는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속에서 느꼈던 온갖 고뇌가 서려 있는 듯하다. 한마디로 꿋꿋한 선비로 살아가고자 했던 의지와 자신의 뜻을 좀처럼 실현하지 못한 선각자의 쓸쓸한 고독이 이 작은 화폭에 완벽하게 담겨 있는 것이다. 한국 회화사상 최초의 자화상인 이 그림은 우리나라 초상화 중 최고 걸작으로 손꼽혀 회화로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되기도 했다.
조선은 진정한 능력 위주 사회 이교수는 전통 초상화의 이같은 사실주의 전통에 매료돼 지난 1975년부터 박물관과 미술관, 고미술상 등 초상화가 있다는 곳은 모두 찾아다녔다. 전통 초상화에 나타난 각종 피부병을 확인해 조선시대 질병사를 완성하겠다는 의지였다. 27년 간 그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대부분을 섭렵했으며, 이 덕분에 의료계보다는 고미술계에서 그를 아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가 됐다.
관상 진단법을 연구해온 이교수가 현재까지 내린 결론은 조선 사회는 적어도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 그는 “좌의정이나 대사관 등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 중에도 애꾸눈이거나 저승꽃으로 불리는 검버섯이 만발한 사람, 코끝이 빨개지는 코주부 등 피부질환을 앓은 사람이 많았다. 지금처럼 외모가 곧 경쟁력이라는 생각은 아예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고 말한다.
그가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찾아낸 가장 흔한 질환은 역시 ‘마마’였다. ‘손님병’ ‘두창’으로도 불리는 천연두는 천연두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며, 고열과 온몸에 발진이 생기는 무서운 전염병이다. 수포가 얼굴에도 생기기 때문에 앓고 난 뒤 그 흔적이 곰보 모양으로 얼굴에 남는다. 전염력이 매우 강해 예전에는 유행을 되풀이해 많은 사망자를 내기도 했으나, 19세기 이후 영국 의사 제너가 창시한 종두가 보급된 뒤부터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난 1993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천연두가 지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마마가 대유행이었다. 그 흔적은 초상화에도 그대로 남았다. 두창 자국이 뚜렷이 보이는 초상화가 10점 중 3-4점을 차지할 정도. 가장 대표적 예가 이덕수의 초상화다. 그는 현종 14년(1673)부터 영조 20년(1744)까지의 사람으로 숙종 때 문과에 급제했으며 영조 6년에는 대사간에 올랐고 이어 대제학을 역임한 당대의 이름난 문인이었다. 이 초상화는 그가 죽기 직전인 72세 때 제작된 것이다. 그림에는 천연두를 앓은 흔적인 ‘곰보’ 자국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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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반성 루푸스'의 전형적인 증상인 나비 모양의 붉은 반흔이 나타난 홍직필의 초상화. 병이 심했던지 한쪽 눈을 잃었다(왼쪽).백반증 증세를 보이는 송창명의 초상화(가운데). 저승꽃이라 불리는 노인성 흑자가 표현된 영조시대 우의정이었던 이의현 초상화(오른쪽). |
검은 색 얼굴과 애꾸눈 재상 마마 다음으로 흔한 질병은 간질환이나 담낭(쓸개)질환이었다. 많은 초상화에서 지금의 말기 간암 환자나 간경변 환자에게 보이는 황달이나 흑달 현상이 발견되는 까닭이다. 황달은 혈액 속의 ‘빌리루빈’이 이상적으로 증가해 피부에 침착되면서 노랗게 염색된 상태다. 빌리루빈은 적혈구에 함유돼 있는 헤모글로빈이 체내에서 대사되면서 생기는 노란색의 부산물이다. 헤로글로빈의 대사는 주로 간에서 이뤄지며 쓸개즙을 통해 체외로 배출된다. 따라서 간이나 쓸개에 이상이 생기면 빌리루빈이 비정상적으로 많아진다. 그 결과 과도한 빌리루빈이 얼굴에 침착되면 황달이, 그 정도가 심해지면 흑달 증상이 생기는 것이다.
오명항의 초상화에는 이런 흑달 증상을 뚜렷이 볼 수 있다. 그는 숙종 31년에 문과에 급제해 경상, 강원, 평안도 관찰사를 두루 역임했다. 이어 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의금부의 책임자로 사건의 수사를 맡게 된다. 반란을 무사히 진압한 공로로 우의정까지 오르게 되나, 자신이 이인좌와 같은 소론이라는 자책과 비판에 시달리게 된다. 오명항은 이 때문에 화병을 얻어 56세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오명항 초상화는 그의 사인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이교수는 말한다. 이교수는 “오명항 선생은 아마 화병이 아니라 간암과 같은 질환으로 사망했을 것이다. 선생의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색깔이 황달을 지나 흑달의 전형적인 증상을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한편 지금은 치료제가 개발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질환도 초상화에서는 발견됐다. 조선 철종때 그려진 홍직필의 초상화에서 지금은 면역 억제제의 개발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홍반성 루푸스’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다. 면역시스템의 이상으로 항체생산에 문제가 생겨 나타나는 홍반성 루푸스는 유전자 이상에서 오는 병이므로 좀처럼 고치기 힘든 만성 질환이다. 지금은 항체의 자가면역 시스템을 막을 수 있는 약이 개발돼 있지만, 그 전까지는 아주 무서운 피부질환 중 하나였다. 나비 모양의 붉은 반흔이 눈과 뺨 주위를 물들이는 이 질환은 심하면 실명에 이르기도 한다. 조선시대 초상화에 애꾸눈이 자주 발견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이교수는 풀이한다.
그는 또한 백반증의 초상화도 발견했다. 조선 영조 때 대사간, 대사헌 등을 두루 거친 송창명의 초상화에서 피부에 멜라닌 세포가 소실돼 생기는 백반증을 발견한 것이다. 이교수는 이 초상화를 세계백반증학회에 소개해 학회에서 발행하는 교과서 첫 장에 조선 선비의 얼굴을 올려놓기도 했다.
처음 이 초상화를 발견한 곳은 국립중앙미술관이었다. 이마 중앙 부위와 왼쪽 뺨 부위가 하얗게 그려진 점을 보고 첫눈에 백반증을 의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술관 전문가는 초상화의 이 부분을 오랜 세월 탓에 탈색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흥미를 느낀 이교수는 초상화를 자세히 분석한 결과, 탈색이 아니라 백반증의 흔적이라는 결론을 얻어냈다. 이교수는 “이마 부위의 탈색이, 까만색이 선명한 사모의 경계선과 너무 차이나는 점, 왼쪽 뺨 부위의 백색이 흰수염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점을 볼 때 이 부분은 세월에 의해 헤어진 흔적이 아니라 백반증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통탈에서도 표현된 피부병 이교수가 조선시대의 초상화 연구를 통해 밝혀낸 우리 선조들의 피부병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저승꽃으로 불리는 노인성 흑자와 모낭염, 얼굴에 울긋불긋 흉한 상처를 남기는 색소성 모반까지 그가 찾아낸 피부 질환은 현재 우리의 피부를 괴롭히는 거의 모든 질병을 포함한다.
이교수는 전통 초상화 외에도 전통탈에 관심이 많다. 다른 나라의 가면이나 탈과는 달리 한국 탈에는 서민들이 가장 많이 앓았던 질병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 예를 들어 손님탈에서는 마마 흔적이, 미알할미탈에서는 심한 주근깨, 신할비탈에서는 백반 증상이 발견됐고, 이상하게 큰 반점과 부풀어오른 코가 특징인 홍백탈에서는 혈관종의 병증이 그대로 표현돼 있다. 심지어 나병 환자를 상징하는 문둥이탈까지 있을 정도다.
이교수는 지금껏 축적된 초상화와 탈 연구 결과를 모아 조만간 책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예술품에 담긴 질병 연구로 현재의 의학발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지난 27년 간 예술품에 나타난 질병 연구를 한 이교수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의외였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성형수술붐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우리 선조들은 외형보다는 마음을 더욱 중요히 여겼으며 마음의 수양에 더 힘썼다. 자신의 얼굴을 솔직, 담백하게 내보일 수 있는 것은 이런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겉모양과 겉치장에 신경쓰기보다는 우리 선조들의 정직하고 담백한 정신을 먼저 배워야 할 것이다."
<김대공, 초상화 관상법으로 선조 질환 밝힌다, 과학동아 2002년 9월호에서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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